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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참지 않기로 했다.

인정하는 용기

by 라온



사람의 감정이란

물그릇과 같아서

참고, 참고, 또 참다가 넘쳐버리면

겉잡을 수 없게 된다.


그시절 나는

감정을 느끼는 것보다
‘참는’ 데 더 많은 힘을 썼다.


그게 어른스러운 줄 알았다.


감정을 삼켜야,

덜 복잡해질 거라 믿었다.

살면서 배운게

그런것 밖에 없었으니까.


그러던중에

부글부글 끓던 '그것'이

결국 넘쳐버리고 말았다.


이상하게,

어느순간 부터는

아무것도 참고 싶지 않아졌다.




그날은

아침부터 기분이 매우 좋진 않았다.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왠지 사람들의 말이 신경 쓰이고,
내가 느끼는 감정들이

제멋대로 엉켜 흐르는 느낌이다.


얼마전 까지만 해도
어떻게든 '나'를

이해시키려고,
어떻게든 억울하고 속상한 이 감정을

눌러 참으려고

정말 필사적으로 노력했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나조차도 잘 모르겠는 내 감정을
굳이 누군가에게

이해시키려 애쓰지 않아도,
굳이 예쁘게 포장해 말하지 않아도,
'이 상태로 두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


그렇게 해서라도

나는 나를 지켜야했다.


그래서 그냥,
그 감정을 놔두기로 했다.
분류도 안 하고,

정리도 안 하고.
그냥 거기 있으라고.


누군가

“무슨 일 있어 보여”라고 말하면
얼른 표정을 고치고는

“아냐, 괜찮아”라고 말하던 내가,
그날은 잠깐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냥 좀 그래.”

더도 덜도 아닌

딱 그 정도의 말.


그 말 안에는
설명하고 싶지 않은 감정도,
굳이 풀지 않아도 되는

마음도 들어 있었다.


감정을 가만히 옆에 두고
함께 앉아 있는 것.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조금

덜 복잡해진다.


울컥하는 순간마다 이유를 찾고,
‘왜 이러지’ 하며

스스로를 몰아붙였던 때가

분명히 있었는데.


그냥 그런 날도 있다고,
그런 날도 살아지는 거라고,
감정의 이유를 찾는 대신
그저 “지금 나는 이렇다”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마음이란 건
무조건 밝아야

유지되는 게 아니고,
불편한 감정을 없애야

회복되는 것도 아니다.


슬픔이 지나간 자리에

평온이 찾아오기도 하지만,
평온은 슬픔과 공존할 수도 있다는 걸.


불안과 안도,
혼란과 차분함,
그 모순된 감정들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걸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전에는
말로 감정을 정리하지 않으면
내 마음도 어지럽게 느껴졌는데,
지금은 그런 날들도

그 자체로 인정하고 있다.


감정을 숨기는 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는 그대로 두는 것’
그게 나에게

가장 필요한 방식이었다.


감정은 생각보다 유연하다.
붙잡으면 무거워지고,
놔두면 흐른다.


한때는 내 안의 감정들이
나를 제멋대로

흔들어대는 줄 알았는데,
감정도 자리를 내어 주면

고요해질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감정들을 억누르지 않고 그대로 두었더니

기분탓인지,

아니면 스스로에 대한 가스라이팅 인지

마음이 덜 피곤한것 같이 느껴졌다.


피하지 않고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회복이 된다는 걸
알게 된 날이었다.


가끔은 속이 울컥하기도 하고,
지나간 일들이 슬그머니

올라오기도 한다.


그런데 그것이
오늘의 나를 더이상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그냥 스치고 지나간다.


마치 창밖 나무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바람은 지나가고, 가지는 남는다.


내 마음도 그렇다.


이젠,

흔들릴 수는 있어도 부서지진 않는다.


누구에게 위로를 받고 싶다는 생각도.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싶다는 바람도.
내 속엔 이미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나와 같이 있어주고 싶었다.
내가 나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되어주고 싶었다.

그냥 그러고 싶었을 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정말 지치고 힘들었던 건
감정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감정을

‘억누르느라 들인 에너지’

때문이었던 것 같다.


참는 건 고요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늘 소란스럽다.


지금의 나는

참지 않고,
설명하지도 않고,
억누르지도 않는다.


그리고도
충분히 잘 살아내고 있다.

아니.

오히려 훨씬 더 '잘' 살아지고 있다.


어두운 날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
내 안의 감정들이

나를 망치지 않는다는 것.


나는 아직도 그 모든것을

조금씩 배워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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