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이 지나간 자리에 나를 다시 세우는 일
메니에르 증후군.
우울증.
공황장애.
대인기피증.
이건
내가 의사를 통해 진단받은
내 병명들이다.
그리고.
아픈몸을 이끌며 살아오다보니
자연스럽게 따라 붙은
'무기력증'은,
한동안 나를
저 병들 못지않게 괴롭혔더랬다.
'무기력'이란
꼭 침대에 가만히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게 아니다.
가끔은 바삐 움직이고 있어도,
일을 잘 해내고 있어도
속은 텅- 비어 있는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어쩐지 모든게 다 허탈하고
허무 해 지는, 그 때를 말하는거다.
그걸 깨닫는 순간,
이미 지독한 '무기력'에
학습 완료 된 상황임이 틀림 없다.
나는 한동안 '그' 상태로 지냈다.
겉으론 열심히 하는 사람,
계획 잘 세우는 사람,
늘 뭐라도 시작하는 사람처럼 보이려고
안쓰러울만큼 애를 써 왔다.
하지만 사실 나는,
그 모든 흐름 안에서
계속 지쳐가고 있었다.
하루의 시작이
꼭 활기차야만
좋은 건 아니고
하루의 끝이
꼭 뿌듯해야만
잘 산 건 아니었을 텐데.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렇게
안절부절, 아둥바둥 살았을까.
요즘 나는,
그저 평범한 하루가
얼마나 고마운 건지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감정이 거세게 지나갔던 자리 위에
천천히 쌓이는 고요.
그리고 그 위에
내가 다시 서 있는 감각.
그건
어느 날 갑자기 오는 게 아니더라.
하루하루 살아내며
조금씩 기울어진 마음을
바로 세우는 작은 반복들이,
눈치 채고 보니
어느새 나를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삶을 바꾼 건
새로운 꿈도 아니고,
특별한 목표도 아니었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 낸 나에게
기어코 찾아 온 무기력을
달갑게 받아들이려는
생각의 전환.
내 속도를 인정해주고,
내 마음을 덜 몰아붙이고,
때로는 멈추는 용기도 괜찮다고 말해준 것.
이제는 예전처럼 살지 않겠다는 작은 다짐.
그것들이 모여
지금의 이 조용한 하루를 만들고 있었다.
시작은 아주 사소한 곳에서 시작된다.
하루의 루틴을 느슨하게 풀었다.
꼭 해야만 하는 리스트를 줄였고,
일어나지 못한 아침을 탓하지 않았다.
기록을 하지 못한 날에도
노트를 펼쳐놓기만 했다.
말이 떠오르지 않으면
그저 빈 페이지를 바라보며
멍 하니 있는 시간을 가졌다.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괜찮은 날이
점점 늘어만 갔다.
아-
벗어났구나.
싶은 순간.
내가 나를 조금씩
회복시켜 왔다는 걸 느꼈다.
아직도 감정은 매일 흔들리지만
예전처럼 무너지진 않는다.
‘잘 지내는 중’이라는 말이
반드시 완벽한 루틴과 열정을
의미하지 않음을
지금에 와서야 알게 되었다.
내가 살아가는 방식은
이전보다 훨씬 느리고 유연해졌지만
그만큼 오래 지속될 수 있는
리듬이 생겼다.
그 차이가
현재의 내가 가진 가장 든든한 변화다.
생각 해 보았다.
내가 나를 다시 세운 게 아니라,
감정이 지나가고 난 자리에
자연스레 다시 서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고.
그래서 요즘은,
결과보다 느낌에 집중하려 노력한다.
하루를 무리 없이 살아냈다면.
기분이 아주 나쁘지 않았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말해줄 수 있게 됐다.
이건 도전이 아닌 유지의 힘이고,
성공이 아닌 균형의 감각이다.
감정은 여전히 출렁이지만
이젠 휩쓸리지 않는다.
대신, 같이 흘러가는 '내'가 있다.
오늘도 나는 어제처럼
천천히, 조용히
그리고 내 속도로 살아낸다.
아주아주 큰 변화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가장 중요한 건 확실하게 달라졌다.
이젠,
더 멀리 가지 않아도
내가 있는 이 자리에서
괜찮을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삶은 충분히 다시 시작되었고
내 시간은 정상적으로 흐를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