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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다 카페

by ondo

우리 동네에 이태리어로 '굽다' 뜻의 이름을 가진 카페가 있다. 여름엔 이 카페를 매일 가다시피 한다. 여긴 이 동네 주민이거나 인근을 자주 다니는 사람들만이 찾을 수 있는 곳에 있다.


큰길에서 식자재마트가 있는 골목으로 들어와 꿈의 모텔을 지나고 오래된 성당을 지나 서로의 안방과 베란다가 엎어지면 코 닿을 듯 다닥다닥 붙은 궁전 빌라, 오션 브리즈 같은 이름이 슬픈 빌라들을 두 블록 지나야 간판을 겨우 찾을 수 있는데 지인에게 약식 지도를 그려 위치를 설명하기에도 번거로운 곳에 이 카페가 있다.


카페 사장님은 배우 정은채를 닮았다. 검은 눈동자가 유독 까매서 주문대 앞에 서면 자꾸 정은채를 닮으셨는데 들어보셨어요?라고 묻고 싶다.

내가 이곳에 자주 가는 이유는 커피값이 아메리카노 기준 3500원으로 저렴하기도 하지만 사장님이 친절하지도 불친절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굳이 따지면 불친절보단 친절에 가까운 편이지만 어느 손님을 맞을 때나 응대하는 표정이 비슷하다.

그녀는 모나리자식의 신비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눈은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약간 숙여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고 바로 주문을 받을 준비를 한다. 아마 그녀도 몸과 마음의 에너지가 안으로 향하는 사람으로, 매일 낯이 설거나 익은 사람들에게 기본적인 인사를 하는 데만 해도 애를 쓰는 것이리라.


개인 카페를 가면 서비스업에 걸맞은 ‘배운’ 미소로 반겨주는 사장님을 만나기도 하는데 내 취향은 안녕하세요? 안녕히 가세요, 인사면 충분하다.

몇 번 들른 이유로 나를 알아보고 개인사를 묻거나 한두 마디 스몰톡을 얹으면 부끄러워서 뒤돌아 나가고 싶다.


아무리 커피가 맛있어도 내가 주인장에게 불특정 손님이 아닌 단골로 각인된 느낌을 받으면 다시 가는 데 약간의 용기가 필요하다.

성향이 내향적인 사람이 다 나와 같진 않을 텐데 내가 생각해도 성격이 좀 유별난 것 같기도 하다. 카페뿐만이 아니라 미용실도 비슷하다. 머리를 할 때 말을 걸지 않는 것, 필요한 말만 듣고, 하게 해주는 것이 스타일리스트의 테크닉만큼 중요한 미용실 선택의 조건이 된다.

이 카페는 납품받은 원두를 직접 블렌딩하고 직화 로스팅하는 방식으로 매일 신선한 커피알을 에스프레소 머신에 넣어 커피를 내린다.

만다린, 아몬드, 리치, 브라운슈거.

커피 노트는 적당한 산미에 고소한 견과류의 향, 갈색설탕의 달콤한 맛이 조화롭게 이루어져 누구를 데려가도 무난하게 맛있다고 한다.


특히 이 집은 아인슈페너가 끝내준다. 아인슈페너를 이 집에서 처음 먹어보고 다른 카페에 가서도 시켜봤지만 대부분 비교가 돼서 실망을 하게 된다.


아는 사람이 하는 카페에서 아인슈페너를 시켰는데 찰랑찰랑한 원샷 아이스 아메리카노 위에 생크림과 로투스 과자를 얹을 걸 내어주는 게 아닌가.

나는 정은채 님의 아인슈페너를 사서 주인장에게 가져다줄까 잠깐 고민했다.


이 집 아인슈페너는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건지 생크림을 마시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입에 들어와 달콤하고 쌉싸름하고 부드럽고 차고 뜨거운 감각이 조화롭게 별안간 휘몰아치다가 난데없이 목으로 넘겨진다.

정은채 님의 아인슈페너는 무려 그런 수준이다 보니 여기 단골은 여름에 대부분 아인슈페너를 시킨다.

핸드블렌더로 생크림을 ‘치다가’ 한두 번씩 손을 탈탈 터는 그녀를 보면 안쓰럽다가도 점심시간, 피크타임인데 조금만 힘내세요,라는 응원을 하게 된다.


아인슈페너는 이 집에서 4,500원. 평균적으로 비싸지 않은 금액이지만 이 집에선 고가에 속하므로 힘들어도 조금만 힘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아인슈페너를 많이 팔아야 월세도 내고 적금도 들고 카페에서의 꿈을 계속 꿀 것 아닌가.

이 동네에서, 특히 여름에 동네를 배회하다가 아인슈페너 생각이 간절한데 들어갈 곳이 없어진다는 것은 내게 큰 상실일 것이다.


나는 며칠 전에 회사에서 기분 좋은 일이 있어서 많이 흥분한 상태로 점심때 이 근방을 배회하다가 더욱더 기분을 위로 끌어올리고 싶어서 정은채 님을 찾아갔다.

그리고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했다. 술 취한 수준의 흥분이었나 보다.


“사장님, 저는 사장님이 너무 부러워요. 얼굴도 정은채를 닮으셨고, 가게 사장님이시고, 매일 맛있는 커피를 드실 수 있고. 저도 카페 하고 싶거든요.”


정은채 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게 말했다. 오래전에 준비한 대답처럼.


“저는 손님이 부러워요. 여름에, 겨울에 길게 휴가도 가시고, 퇴근하면 쉬실 수 있고, 주말도 있으시고. 연차도 있으시고.”


내가 올 때마다 이 카페를 운영하는 사람의 특별한 운에 대해 생각할 때 그녀는 나의 한갓진 점심시간과 5시간 뒤 깔끔히 종료될 나의 업무 계약시간을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가 한여름에 이 시원한 카페에서, 북적북적한 손님들 사이에서 자신의 좋은 운과 기회에 대한 감사가 아닌, 일개 9 to 6 고용인을 향한 부러움에 마음이 향했다는 것이 조금 놀라웠다.


나는 언젠가 커피를 팔고 책을 파는 동네 책방을 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아이를 키우는 상황에서 어느 정도의 경제적인 자유 없이는 요원한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언젠가는, 생각지도 못한 운이나 기회가 오면 혹시나… 하는 꿈을 여전히 꾸고 있다. 돈을 벌어도 벌지 않아도 괜찮은 상황이 과연 내게도 올까?


말의 뉘앙스로 봐서 사장님은 이 카페를 내기 전에 직장 생활을 했던 것 같다. 자영업자로 일하는 현재의 자신이, 월급쟁이였던 과거의 자신을 부러워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후회할까? 그때 그 직장을 계속 다녔더라면 착실히 월급을 모으고, 퇴직금도 쌓이고, 어쩌면 엄마(엄마가 카페에서 일을 돕는다.)로부터 독립을 하고, 어쩌면 결혼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이루어지지 않은 현재의 자기 모습을 그려보면서.


주체할 수 없는 행복감에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은 아닐지라도 매일 평온한 모습으로 손님을 받고 에스프레소를 내리고 생크림을 치던 그녀의 모습 속에서 미처 생각지도 못한 ‘상실‘을 마주하고 보니 나는 사무실에 들어와 내 일에 조금 더 집중하고 싶어졌다.

노란 파일 안에 쌓인 서류를 조금 더 꼼꼼히 검토하고, 윗선에서 받은 견해서를 편집하는 데 공을 많이 들였다. 어느 하나를 선택하면 선택하지 않은 것이 주는 좋은 것들 또한 흘려버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으면서.


나는 정은채 님이 만든 아인슈페너를 오래도록 마시고 싶다. 단골손님과 사장과의 경계가 뚜렷하지만 예의와 다정함의 범주 안에 있는 동네의 카페에서 오늘 가도 내일 가도 같은 표정으로 안녕하세요, 인사뿐인 그 귀한 곳에서 나는 오래도록 무명의 단골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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