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닦아 주지 못한 눈물

by 라라

제 25장 닦아 주지 못한 눈물


각자의 시간은 그렇게 흘렀고 고요한 일상에서도 한 아이의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뜨거운 여름부터 공부로 불태웠던 만석이의 경시대회 날이었다.


그 대회에서 자신의 실력을 모두 발휘하고 싶었다.

그래서 손마디가 부르트도록 일하는 엄마에게 희망을, 정순이 누나의 얼굴에 웃음을, 창석이 형의 땀에 보람을, 자신의 뒷배가 되어준 매형의 믿음에 보답을 하고 싶었다. 혼자였다면 어린 마음의 결심이 오래가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찬하 선생님과 함께였기에 만석이는 그간의 과정이 쉬웠고 재미있었다.


곧 시험 결과가 나왔고 만석이는 최우수상을 받게 되었다. 장흥 시골 촌구석의 아이가 도 대회에서 일등을 했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순천에서고 목포에서고 공부로 난다 긴다 하는 아이들이 죄다 나오는 대회였기 때문이다. 만석이에게 처음 그 소식을 알려주던 담임 선생님의 얼굴엔 감격스러움이 가득했다.


“만석이가 결국엔 해냈구나!”


친구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으며 만석이는 오래도록 그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다. 담임 선생님과도 한판하고 매형과도 대판했던 교장선생님도 만석이가 최우수상을 받게 되자 한판 대판 했던 그 교장실로 만석이를 불러들였다.


“역시, 교장선생님은 만석이가 해낼 줄 알았단다. 하하하!”


지난날 그의 편견이 자기것이 아니었다는 듯 내던지고서 인자하게 웃던 교장선생님은 만석이 등을 몇 번이고 두들겼다. 지난날 만석이는 그를 한방 먹이고 싶을 만큼 미웠었다. 하지만 눈부신 결과와 함께 마음이 넉넉해진 덕분인지 그것들은 모두 묻어둬도 괜찮을 만큼 아무렇지 않았다.


학교가 파하자마자 제일 먼저 쌀 집으로 달려가 매형에게 소식을 알렸다.


“역시! 나는 처남이 해낼 줄 알았당께!”


매형은 온몸을 흔들어 대며 기뻐했다. 잇몸이 만개해서 쌀집에 드나드는 손님을 한 명씩 잡고 자랑하는 모습에 만석이 가슴이 뻐근했다. 엄마의 시장 좌판과 연순이 누나 집을 거쳐 집에 있는 누나와 형과 동석이, 아버지에게까지 알리느라 만석이의 하루는 벅차게 지나갔다.


은철이는 등수에도 들지 못했기에 만석이의 경쟁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알았다. 아이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더 나아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남외리 신동 이만석, 전라남도 수학 경시대회 최우수상 수상!”


플래카드는 마을 입구에도, 교문에도, 군청 앞에도 붙었다. 이 소식이 시장 사람들에게 퍼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연순이네는 늘 짠했다. 술주정뱅이 남편이 이제는 중풍에 들어 그 병수발을 해야 하는 기구함은 동정받기에 딱 알맞았다. 그런데 만석이가 이룬 쾌거가 엄마를 시장바닥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에서 제일 부러운 사람이 되도록 만들었다. 발 없는 소문은 날개를 달고 자꾸만 멀리멀리 날아갔다.


“이 집이 그 수학 경시대회에서 전라도 1등을 한 집이라던디… 애기가 어째 그라고 똑똑하다요?”


오가는 행인들은 엄마에게 비법을 물었다. 엄마는 그것만으로도 인생이 재미져서 밥을 안 먹었는데도 배가 불렀다.


연순에 대한 마음을 접지 못해 미친 사람처럼 뛰어들었던 과외선생 자리였지만 찬하 또한 지금껏 가려졌던 아이의 천재성이 빛을 발할 수 있도록 돕는 과정이 즐겁고 보람 있었다. 그것이 이제는 떠나야만 하는 이에게 한 자락의 위로가 되어 주었다. 그날, 찬하는 마지막 수업을 마쳤다.


“연순 씨… 오늘이 마지막 수업이었어요.”


찬하는 배웅을 나온 연순에게 조용히 말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잎사귀가 다 떨어진 마당의 감나무가 왜 그렇게 먹먹해 보였을까. 앙상한 가지 틈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어쩐지 가슴속으로 스며드는 듯했다.


“…갑자기, 왜…”


그간 그렇게도 마음을 다잡았지만, 찬하의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툭, 주저앉는 것 같았다. 그가 사라진다는 생각 하니 눈앞의 풍경이 다르게 보였다.


“선생님 군대 가신대.”


전부터 알고 있었던 듯한 만석이가 두 눈이 그렁해져 말했다.


“짜식, 사내아이가 눈물이 그렇게 쉬워? 연순 씨, 앞으로 만석이가 공부할 때 필요한 것들은 이 종이에 써놨어요.”


만석이의 머리를 흐트러뜨리며 달래던 찬하가 종이 하나를 그녀에게 건넸다. 그 종이에는 단계별로 풀어야 할 문제집이 정리되어 있었고 만석이가 읽어야 할 도서가 적혀있었다.


“언제… 가시는 거예요?”


종이를 받아 든 연순이 떨리는 눈빛 속 슬픔은 숨기고서 물었다.


“짐은 다 싸놨고 서울에 계신 부모님도 뵈어야 해서 모레는 가려구요.”


짐을 싸면서 마음도 다 정리했을까. 찬하는 미리 연습해 온 사람처럼 말했다.


“선생님, 가실 때 저 터미널에 나가봐도 돼요? 선생님 가시는 거 보고 싶단 말이에요…”


만석이가 곧 울음을 터뜨릴 듯 올려다보며 말했다. 지금까지 배움의 즐거움으로 온몸을 떨리게 했던 선생님을 그냥 보내기엔 어린 마음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요… 저도, 정순이도 함께 나갈게요. 정순이도 선생님이 가셨다고 하면… 서운할 거예요.”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싶었다면, 그것은 붙잡고 싶은 마음을 감춘 마지막 욕심이었을까.

그렇게 가슴 떨리는 사랑을 곱게 접어 보내주고 싶었다면, 그건 스스로에게 건네는 마지막 위로였을까.


“그래요… 그래요.”


선한 그의 얼굴 위로 모든 욕심을 덜어 버린 단정한 미소가 희미하게 지어졌다.

지나는 시간을 그들의 아쉬운 마음으로는 붙잡을 순 없었다. 어느덧 찬하가 떠나는 날이 되었다. 터미널에는 만석이, 정순이 그리고 연순이가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찬하의 짐은 큰 가방 하나가 전부였다. 만석이는 선생님 앞에서 서운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엉엉 울어버렸다.


“으이그, 너 선생님 없어도 계속 공부해야 한다. 선생님이 휴가 때마다 확인할 거야. 알겠지? 그리고 이것은 정순이 거…”


만석이를 달래던 찬하는 정순이에게 두꺼운 책 한 권을 건넸다. 루이자 메이 올컷의 『작은 아씨들』이었다


“정순이 넌 누가 뭐래도 배울 아이야. 계속 꿈을 꿨으면 좋겠어.”


정순이의 눈에도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모든 것을 정리한 사람 같은 선생님의 얼굴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씁쓸함과 딱함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는 정순이가 무너지는 가정 속에서 그것은 짊어져야만 했던 아이가 아니라 소녀였다는 것을 알게 해줬다. 선생님 때문에 혼자 들떴고 언니와의 소문에 남몰래 실망하고 눈물 흘렸던 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마지막, 선생님과 언니의 격정을 보고 배신감과 안타까움으로 혼란스러워했던 날도 떠올랐다. 그럼에도 눈에 띄지 않은 정순이의 삶을 응원해 줬던 찬하는 언제까지고 그녀의 마음에 소중한 추억과 선생님으로 남게 될 것이었다.


“… 그리고, 이것은 연순 씨 거예요. 나중에 열어봐요.”


찬하는 담담하게 작은 꾸러미 하나를 내밀었다. 연순이는 건강하게 잘 지내라는 말로 답하며 그것을 받았다.


찬하를 태운 버스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멀어졌다. 만석이, 정순이 그리고 연순이는 그 버스가 멀어지다가 사라질 때까지 바라 보고 서 있었다. 만석이는 그때까지도 흘리던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그런 동생을 달래주던 정순이도 눈물을 글썽였다.

언니는 그들 가운데에서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그것이 정순이 눈에는 왜 더 슬프게 보였을까.


한참 터미널에서 서 있던 그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하얀 것이 하늘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누나! 눈 내리네. 올해 첫눈 인갑서.”


첫눈을 보고 벌써 눈놀이 생각을 한 건지 만석이는 금세 다시 밝아졌다. 눈이라기엔 아직 영글지 못한 이슬 같기도 흩날리는 먼지 같기도 한 그것, 첫눈.

서툴렀고 그래서 더 아팠던 그들의 사랑을 닮아 있었다.


찬하를 보내고 동생들도 집으로 보낸 연순은 방안에 우드커니 앉아 그가 건넨 꾸러미를 차마 열어 보지 못하고 한참을 쳐다보았다. 연료가 떨어질 집도 아니었건만 어쩐지 방이 더 싸늘한 것 같았다. 찬하와의 시간을 더듬어 보았다. 그와의 사랑은 예기치 못한 사고였고 그와의 이별은 지나간 계절이었다. 억누르려 해도 억눌러지지 않던 감정,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던 시간, 지우고 싶어도 지워지지 않던 이름이 지나갔다.


찬하는 연순을 상처받아 부들대며 두려움에 떠는 짐승이 아닌 마음껏 마음을 떠는 여자 이게 했다. 매일을 견디듯 살아온 그녀에게 찬란하고도 아릿한 사랑을 선물해 주었다. 지나간 마음을 정리하고서야 펼친 꾸러미엔 잔꽃 무늬가 가득한 손수건 한 장과 편지 한 장이 있었다.


『…연순 씨가 이 손수건을 쓰는 날이 없었으면 해요. 그럼에도 그런 날이 있다면 이것이 당신의 눈물을 닦아 줄 수 있었으면 해요. 당신과 함께했던 날들이 선물이었어요. 고마워요.

―찬하― 』



다 읽고서야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

그 눈물이 볼을 타고 내려와 찬하의 편지를 적셨다.

그렇게 찬란하고도 가슴 시리도록 아팠던 사랑이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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