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말할 수 없이 짠 것

by 라라
ChatGPT Image 2025년 12월 29일 오후 11_44_29.png

고만고만한 사람들에게 돈을 빌리러 다녔던 엄마였다.

그들은 딱한 사정을 안타까워했지만, 가난에 얹을 돈은 나오지 않았다.

빈손으로 돌고 돌다 엄마는 결국, 막걸릿집 앞에 섰다.

동생이 하는 읍내의 그 막걸릿집. 큰딸 연순이 식모살이하러 갔다가 끔찍한 일을 당한 이후, 피눈물을 삼키며 끊어낸 인연이었다.


주춤대며 한참을 서 있던 엄마는 씁쓸한 한숨을 내쉬고서야 문을 밀었다.

상을 닦던 이모는 가게로 들어선 엄마를 보고, 헛것이나 본 것마냥 눈이 휘둥그레졌다.


“연순이 여울 때도, 형부 돌아가실 때도 기별도 없더만. 영 인연 끊은 거 아니었단가? 여까지 국밥 먹으러 올 위인은 아닐 것이고, 해가 서쪽에서 뜨겄네?”


이모는 탁, 소리가 나도록 냉수 한 그릇을 내려놓았다.

엄마는 쉬지도 않고 그 물을 꿀꺽꿀꺽 삼키더니, 굳게 다물었던 입술을 들썩이며 말문을 열었다.


“돈 좀 있으면, 나 좀 주라.”


엄마는 목에 걸려 영 나오지 않을 것 같던 그 말을 내뱉었다. 이모의 얼굴이 차갑게 변했다.


“와따- 와따. 이 코딱지만 한 시골 바닥에서 몇 년 만에 봄시로 시방 꺼낸 말이, 다짜 고짜 돈 달라는 소리 단가? 누가 보믄 맽겨놓은줄 알겄네?”


“그냥 달라는 거 아니고- 갚을 건게. 내가, 오죽하면 너한테 왔겄냐.”


평소 엄마의 성정을 아는 이모는 말을 더 붙이지 못했다. 그저 참고 견디는 게 익숙한 사람이었다. 몇 년 만에 행색이 더 초라해진 언니였다. 씁쓸한 한숨이 나왔다. 이모는 일어나더니, 뒷방에서 신문지에 말린 꾸러미 하나를 들고나왔다.


풀어헤쳐진 신문지 안에는 돈이 있었다.

엄마가 그렇게나 바랐던 돈.

이모는 손에 침을 바르고 그것을 한 장 한 장 세어 넘겼다.


“이 정도면 된가? 언니 장사 못 하게 생겼다고 여기 오는 손님마다 야기 해쌌더만. 돈 나올 데가 그라고 없단가?”


다시 신문지에 말아 엄마에게 건넸다.


“이자는 됐고, 천천히 주소. 연순이 혼삿돈도 못 해줬고… 형부 장례 때도 그랬은께. 언니가 돈 떼먹을 위인도 못 되겄고.”


엄마는 조용히 꾸러미를 주머니에 넣었다.


“사람들이 연순이를 그라고 씹어 쌌대. 그 썩을 것은 지 엄니 죽어나는 것도 모르냐고. 부잣집에 시집을 갔으믄 친정을 챙겨야 쓴 거 아니냐고!”


그 소리를 듣자, 엄마의 눈에서 뜨거운 불똥이 튀었다. 속없이 주절대던 이모는 엄마의 매서운 눈앞에서 다시 살랑거렸다.


“사람들이 속도 없이, 그랬다는 것이제. 내가 뭐라 해놨네… 연순이는, 잘 살지?”


안부를 물으면서도 지난날 종복이가 와서 깽판를 쳤던 그 일만은 차마 꺼내지 못했다. 아무래도 조카사위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그것이 내려가지 않은 체증처럼 가슴 한구석에 걸려 있었다.


“연순이가, 잘 살지! 그 이쁜 것이 못 살 일이 뭐가 있겄냐? 즈그 남편 사랑받고, 시부모님 공경하고, 그라고 잘 살지!”


“아, 그럼, 그라지. 종복이는 연순이를 업고 다녀야제… 헤헤‥”


“이 돈은 꼭 갚을 것이여. 내가, 꼭. ”


엄마는 담담하게 말하더니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밥도 안 먹었을 것인디… 국밥 좀 한 그릇 말고 가제―”


이모는 엄마를 더 붙잡지 못했다. 지난겨울 종복이의 뒷모습과 겹쳐 보였기 때문이었다. 돈을 빌려주고도 당당하지 못한 것이 영 찜찜했다. 그러면서도 두말하지 않고 내주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봄이 온 지가 언제인데, 강바람이 매서웠다. 날카롭게 날아든 바람 때문일까. 눈앞이 자꾸만 희뿌예졌다. 엄마는 주머니로 손을 넣어 신문지에 말린 돈 뭉텅이를 만져봤다.

하루 벌이의 삶은 차라리 혀를 깨물어 죽지 싶었던 각오마저도 지킬 수 없었다. 가난 앞에서 부린 오기는 얕은 파도에도 흩어져 버리는 모래성이었다.


뜨거움은 흘러내려 조용히 입술을 적셨다.

짜다.

말할 수 없이 짜다.

지키고 싶은 것이 많은 엄마는 그 짠 것을 울컥울컥 다 삼키고서 또다시 나아가야 했다.


한편, 우리상회에서 일하는 정순이에게 골칫거리가 하나 생겼다. 날마다 출근 도장을 찍는 현철이 때문이었다. 그는 빙글빙글 웃으며 주변을 맴돌았다. 말 한번 섞어 보려고 애를 쓰는 속내를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이 없었다.

정순이가 얼음과 생선이 가득 담긴 양동이를 들고 갈 때였다. 현철이 거들겠다고 잡아 뺐다가 다 쏟아지고 말았다.


“아! 진짜 좀!”


참다못한 정순이 비명을 질렀다. 온몸이 차가운 비린내로 축축하게 젖어 드는 것보다, 말하기 좋아하는 시장 사람들 앞에서 이런 꼴을 보이는 게 더 화끈거렸다. 현철은 얼음을 뒤집어쓴 정순을 닦아주려 허둥지둥 손을 뻗었다. 가벼운 입방아는 이 미끼를 그냥 넘기지 않았다.


“어이구, 정순이는 현철이가 점 찍어브렀는디?”


“그러게나 말여. 학교 끝나기가 무섭게 달려와서 저러니. 이 집 둘째가 속 차리는 것을 다 보네.”


“현철이가 이 집 애물단지였제- 종일 사고만 쳐대니 이번에 아주 짐 싸서 데꼬 내려왔다더라고. 사장님도 두손 두발 다 들어브렀제?”


“즈그 집 부자것다, 뭐가 걱정이여? 큰 아들은 서울로 보냈은께 둘째는 여그서 아부지 사업 이어 받음 쓴거 아니단가?”


“저라고 좋아서 뒤꽁무니를 쫄래쫄래 따라다니니… 조만간 우리상회 경사 나는 거 아닌가 모르겄네. 껄껄껄”


그 소리는 사장의 귀에까지 흘러 들어갔다. 못마땅한 얼굴로 아들의 꼴을 지켜보면서도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같은 뱃속에서 나와도 첫째와는 판판이 달랐다. 유학이랍시고 보낸 서울에서 사고만 치다 내려온 막내. 현철은 사장에게 있어 가장 값비싼 애물단지였다. 그 골칫덩이가 날마다 출근도장을 찍어 가며 일하는 것을 보니, 내심 정순이가 며느릿감으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순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갔다.


“야, 너 내 말 안 들려? 나 일해야 한다고!”


“그러니까 내가 도와주고 있잖아. 하핫”


“나, 너랑 소꿉장난하러 오는 거 아니거든? 오늘만 해도 양동이를 몇 번이나 엎었는지 알아?”


“아, 그니까 내가 도와줄 때 너는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잖아. 왜 뿌리쳐서 이 난리를‥”


헤실거리는 현철은 거머리 같았다.


“한 번만 더 내 물건에 손대면 그땐 사장님한테 다 말할 거야!”


정순이 이를 악물고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댔지만, 전혀 타격감 없는 현철은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어느덧 엄마는 우리 상회 앞이었다. 안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소리를 따라 들어가 보니, 앞치마를 입은 정순이가 양동이 하나를 두고 멀끔한 남학생과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정순아, 뭔 일이냐?”


그 목소리를 듣자, 정순이가 엄마 쪽으로 뛰어들어 그 등 뒤로 바짝 몸을 붙였다. 뒤따라오던 현철이 웃는 얼굴로 예의도 바르게 인사했다.


“어머니, 안녕하세요. 정순이 학교 댕길 때 같은 반이었던, 현철이입니다.”


“으응, 그런가. 근디 시방, 무슨 일 인거여?”


“정순이 도와주고 있었는데요. 여기가 저희 가게이기도 하고… 헤헤”


그 말에 엄마는 딸을 돌아보았다. 어두운 낯빛의 정순이 헤진 신발만 쳐다보고 있었다.


“인자는 우리 정순이를 도와줄 일은 없네. 신경 끄소. 정순이는 따라 오니라.”


단호하게 말한 엄마는, 정순이의 손을 잡아끌고 우리상회 안으로 들어갔다. 사장은 책상에 앉아 장부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사장님, 지 왔소. 좀 늦었지만 이자 쳐서, 밀린 외상 이 자리에서 다 갚은께 맞나 세어보쇼.”


사장은 돈 꾸러미와 엄마를 번갈아 보다가 돈을 헤아렸다.


“맞구만. 이자까지.”


“인자, 내일부터 지한테 생선 주시고라.”


“알았네.”


“한 가지 더 드릴 말씀이 있는디라.”


정순이를 잡고 있던 엄마의 거친 손은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정순이는 내 금쪽같은 딸이오. 지가 돈이 없지, 가우가 없지 않소. 여그서 얼마간 일은 했으나 이 집 아들 놀잇감이 되라고 냅둔 것이 아니오. 아드님 단속 좀 해주쇼.”


담담한 그 말에, 사장의 낯빛이 붉으락푸르락 변해갔다.


“으흠, 흠. 지들이 좋아서 그런 것을…”


“그게 뭔 말이다요? 내 딸은 눈곱만치도 마음이 없는디?”


사장은 뒤따라 들어오던 현철을 못마땅한 눈으로 쏘아보았다.


“흠, 흠. 그것은 일단 알겄고.”


“내일부터는 정순이도 이 집에 더는 출근 안 할 것이요, 그리 아시고요. 여튼 앞으로 잘 부탁 하네요. 정순아, 얼른 앞치마랑 장갑 벗어브러라.”


어안이 벙벙해진 정순이 멍한 얼굴로 엄마와 사장을 번갈아 보았다. 엄마는 그런 정순이의 손을 잡아채며 우리상회를 빠져나왔다.

그들 뒤로 사장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엄마는 우리상회를 나와 정순이를 데리고 장을 봤다. 아이들 먹일 돼지고기와 소고기도 두어 근 샀다.

그날따라 나비 장식이 달린 노오란 구두가 눈에 띄었다. 엄마는 정순이에게 한번 신겨보고는 그것도 샀다.


생전 돈 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엄마가 무섭게 돈을 썼다.

이 돈들이 다 어디서 났을까, 불안하고 궁금했지만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슬쩍 훔쳐본 엄마의 얼굴은 단단해 보이면서도 톡 하고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무너져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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