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드라마의 위대함- 어머니의 소고기 고추장볶음

가장 보통의 레시피 - 소박한 식탁 위 발칙한 잡담들

by 웅숭깊은 라쌤

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하는 교사라는 직업은 여러 방면에서 다양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각자의 세상을 펼쳐나갈 장면들을 상상하다 보면 그 미래가 마치 나의 것인 양 뿌듯해지기도 한다. 나이 먹는 게 두렵지 않은 직업이라 할 수 있다. 아이들의 20대, 30대를 기다리면서 가끔 조금 더 빨리 나이를 먹고 싶을 때도 있을 정도이니.

물론 이 매력은 뿌듯함만으로 그치는 것은 아니다. 마냥 순탄대로가 펼쳐진 세상이 아님을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일깨워 주어야 하는 막중한 책임감이 늘 공존하고 있다. 다행히 이러한 역할은 내게 큰 어려움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를, 그들과 같은 삶을 살아왔을 때를 기억 밖으로 끄집어내면 된다. 마침 난 고등학교 졸업 후 재수 생활을 했고, 대학교 졸업 후 백수 생활을 했다. 하길 잘했다. 아이들에게 전할 말이 참 많아졌으니.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나의 스승이 내게 그랬던 것처럼 많은 이들의 스승이 되어 그들의 삶을 총천연색으로 물들여주고 싶었다. 허나 2000년대 중반 청년 실업이 급증하던 그때에 미래가 확실히 보장된 교사라는 직업은 수많은 이들의 꿈이었고, 교육대학이나 사범대학의 문턱은 나의 키보다 훨씬 더 높아져 있었다. 성장이 더딘 나에겐 시간이 필요했고, 대학 등록금은 재수학원 등록비로 용도가 변경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은, 기회였다!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아온 지난 과거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60명이 빽빽하게 모인 강북 종로학원의 숨 막히는 어느 교실 안에서, 시간을 허투루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군대에서 막 전역한 큰 형님부터, 대학을 다니다 적성에 맞지 않아 다시 수험생으로 돌아온 이들까지 그 누구도 지고 싶어 하지 않았다.

패배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내 안에 존재하는 적을 이기는 것이라는 인생 최고의 교훈을 얻게 된 후 원하는 대학, 원하는 학과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런데 졸업만 하면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선생님 소리’를 듣게 될 것이란 ‘여유’라는 녀석은, 다시 한번 대학 생활을 ‘나태’라는 이름의 적에게 농락당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여유와 나태는 닮아있었지만, 분명 달랐다. 그리하여 대학 졸업과 동시에,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청년 백수’가 되었다.


대학생이 아닌 내가 더 이상 기숙사 생활을 할 수는 없었기에, 짐을 싸 들고 부모님이 계신 본가에서의 삶을 시작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 살았던 집인데, 무척이나 어색하고 답답했다. 백수라는 신분에 의한 심리작용일 수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부정적인 감정을 부추긴 것은 ‘아침’이란 시간이었다. 어머닌 장교 출신인 남자를 남편으로 두고 30여 년을 살아온 분이셨고, 아들은 해가 중천일 때 잠에서 깨어나던 평소 습관을 고쳐야만 했다. 더군다나 어머니가 자신을 위해 차려놓은 밥상을 받는 일은 직장 대신 도서관을 향해야 하는 아들의 입장에선 결코 편한 일은 아니었다. 대화를 하는 것이 두려웠고, 덕분에 백색소음조차 느껴지지 않는 공허함이 점점 집안을 채우고 있었다. 이를 깨뜨리기 위해 시선은 분주하게 움직였고, 그때 시야에 들어온 것이 바로 TV 리모컨! 리모컨을 집어 들었던 그 행위는, 아들을 다시 한번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해준 놀라운 반전의 시작점이 되었다.

아침 드라마가 한창이었다. KBS1의 TV소설로 시작된 드라마는 이어 MBC, SBS, 마지막 KBS2까지 공중파 3사의 4대 채널에서 모두 방영되었고, 약속이나 한 듯 방영 시간이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졌다. 더욱 놀라웠던 사실은 네 편의 드라마가 가지고 있는 ‘몰입감’이었다. 수많은 인물들은 쉴 새 없이 갈등을 겪었고, 모든 사건과 순간은 극적 劇的이었다. 게다가 연기를 하는 배우들이 잠시 잊혔던 옛 스타들로 채워져 있으니 나로선 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뜻하지 않게 매일 아침 어머니와 ‘아침 드라마 시청 시간’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지난 줄거리’와 같은 드라마 이야기를 계기로 우린, ‘대화’를 시작하였다.


어머니는 말솜씨가 좋았다. 무엇보다 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글공부’가 하고 싶어 자식을 다 키우고 다시금 방송통신대학의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했을 정도로 그 열망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일은 아침 드라마를 시청하는 것만큼이나 흥미진진했다. 덕분에 우린 매일 네 편의 아침 드라마가 끝나고 나면, 이어 다섯 번째 드라마를 시청할 수 있었다. 주인공은 학창 시절 왕복 4시간 거리의 학교를 매일같이 걸어 다녔고, 농사일로 학교를 빠지게 되면 뒤처진 진도를 따라가기 위해 몇 날이고 밤을 지새워 교과서를 들여다봤다. 심지어 밤에 몰래 책을 보기 위해 화장실 불빛을 이용했다는 전설 속에서나 존재할법한 장면도 있었다. 매일같이 새로운 꿈을 꾸지만, 언제부턴가 그 꿈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 자식을 위한 것이 되어 버린 가슴 아픈 장면도 물론, 있었다. 그리고 주인공은 세월이 흘러 아들에게 아침 밥상을 차려주고, 아들과 아침드라마를 시청한 후, 아들에게 자신의 삶을 들려주었다. 장면들은 고스란히 아들의 머릿속에서 각각의 신scene이 되어 한 편의 드라마로 완성되었고, 그것은 그 어떤 아침 드라마보다 위대하고, 아름다우며, 아픈 것이었다. 청년백수 시절의 나는, 직업이나 월급과는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을 보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어머니를 배워가는 시간’이었다.

어머니를 배우며 알게 된 가장 충격적이었던 사실은, 어머니가 차려놓은 밥상은 결코 휘리릭 하고 순식간에 차려지는 게 아니란 점이었다. 반찬 한 가지를 위해 투자되는 어머니의 정성과 노력은, 오직 가족을 위한 사랑이 밑바탕이 되어야만 가능한 행위였다.


온 가족이 즐겨 먹는 밥도둑, 소고기 고추장볶음을 위하여 어머니는 고기 다짐육 200g, 고추장 200g을 비롯해 다진 양파와 다진 마늘, 다시마 육수와 맛술, 설탕과 조청을 준비한다.

팬에 기름을 두르고 중간 불에 투명해질 때까지 양파를 볶는다. 이어 고기를 넣고 함께 볶다가 마늘과 맛술을 넣어주고, 고기가 익으면 고추장을 추가하여 농도를 확인하며 육수와 함께 졸여준다. 마지막엔 설탕과 조청을 넣은 뒤 잘 섞으면 완성.

재료 준비과정과 조리 과정 모두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었다. 정확한 계량과 시간이 필요했고, 조금만 시야에서 벗어나면 쉽게 타버리거나 졸아버렸다. 레시피 그대로 따라 해보아도 언제나 맛은 조금씩 부족했다. 소고기 고추장볶음뿐이겠는가. 어머니의 밥상을, 나는 절대 흉내 내지 못할 것이다.


학교에서 나의 아이들은, 아니 아이들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이들은 자신의 고통을 가장 높은 언저리에 두고 싶어 한다. 그런데 그것은 결코 고통을 이기는 방법이 될 수 없다. 얼마나 분에 넘치는 행복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자신이 주인공인 드라마에서 그 주인공 자리를 나에게 넘겨주고 스스로를 무대 밖으로 밀어낸 그런 존재들이 누구에게나 있다. 당신도 마찬가지이며 혹시나 그걸 몰랐다면, 소고기 고추장볶음을 곁들인 아침 밥상에서 꼭, 드라마를 보도록 하자. 지금까지와 다른 위대한 내일이 펼쳐질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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