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보통의 레시피 - 소박한 식탁 위 발칙한 잡담들
1889년 6월, 이탈리아 움베르토 1세의 왕비인 마르게리타에게 최고의 피자를 선사하기 위해 나폴리 최고의 장인이 손수 등판하셨다. 돈 라파엘 에스폰트. 당대 최고의 요리사로 알려져 있던 그는 바질과 토마토, 모차렐라치즈를 이용해 이탈리아 국기를 상징하는 아름다운 피자를 완성해냈다. 마르게리타 왕비는 매우 흡족했고, 이후 이 피자의 이름도 그녀의 이름을 따 마르게리타 피자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피자 전파는 미군 부대가 그 역할을 아주 톡톡히 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미국식으로 변형된 피자이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많은 이들이 즐길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전국 각지에 미국의 피자 업체들이 들어왔고, 피자에 눈을 뜬 대한민국 사람들은 피자의 본고장, 이탈리아식 피자에도 눈을 뜨게 되었다. 레스토랑에서만 먹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던 피자는 이제 가정집에서 마음만 먹으면 쉽게 만들어낼 수 있는 대중적인 음식이다.
그런데 나폴리의 정통 마르게리타 피자로 인정받기 위해선 매우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전기 화덕 금지. 반드시 장작 화덕을 사용해야 한다. 더불어 온도는 485도로 맞출 것. 당연히 피자는 원형이어야 하며 손반죽을 하되 피자 가운데 두께가 0.3cm를 넘으면 안 된다. 끄트머리, 그러니까 크러스트 두께도 2cm를 유지해야 하는데 완성된 피자의 촉감은 쫄깃하고 부드러워 쉽게 접을 수 있어야 한단다. 이, 이렇게나 많다고? 그저 바질, 치즈, 토마토만 쓰면 다 정통인 줄 알았는데 역시나 피자의 본고장은 까탈스럽기 그지없다.
사실 이렇게 만드는 건 가정집에선 불가능에 가깝다고 봐야지. 그래서 수많은 조건을 깡그리 무시하고 아주 간편한 마르게리타 만들기를 소개한다. 또띠아, 바질 페스토, 토마토와 모짜렐라. 이 네 가지면 모든 재료를 전부 충족했다고 말할 수 있다. 또띠아에 재료를 올려 오븐에 살짝만 구워주면 금세 초간단 마르게리타 피자가 완성된다. 아니, 너무 ‘야매’아니냐고?
이것을 그럼 무어라고 불러야 하나. 이 피자의 이름은 마르게리타 피자가 맞다. 조금 달라졌을 뿐 정체성이 변하지는 않은 것이다. 마르게리타의 기본 요소는 잘 갖춘 것 아닌가. 그럼에도 자꾸만 다른 조건들이 붙는다? 에이, 그렇게까지 해야겠어? 마르게리타 피자는 무엇보다 맛이 먼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소위 이 ‘야매 마르게리타’도 엄청나게 맛있다니깐? 마르게리타 피자라 부르기에 전혀 손색이 없다. 심지어 먹기도, 만들기도 간편하니 어쩌면 더 나은 피자인 게 아닌가!
정석 혹은 정통이란 말은 많은 지구인에게 자부심이나 자신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때론 과한 조건으로 인해 피곤함을 유발할 수도 있다. 사랑에 관해 논해보자. 실제로 정석적인 사랑은 없다. 이런 사랑도 사랑이고, 저런 사랑도 사랑이다. 절대 누군가를 사랑하는 데 있어 어떤 제약이 있다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랑을 하기 전 우린 꼭 상대의 조건을 확인한다. 내가 사랑해도 될 사람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왜 그 사람의 외모, 학벌, 집안, 재력 등이어야 하는 걸까? 굉장히 깐깐하게 ―마치 정통 마르게리타 피자의 까탈스러움처럼― 그 판단을 위해 따라붙는 조건들은 가혹하고, 비인간적이며, 잔인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반대로 그런 사람이 되어야만 사랑받을 수 있을 거란 오해도 발생한다. 인간적인 면모를 갖추기보단 자신을 둘러싼 화려한 수식어를 만들어내기 위해 혈안이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의 교육열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자식의 인성보단 학벌만을 중시하는 수많은 이들로 인해 이젠 대입을 넘어 고입에도 목숨을 건다. 어느 고등학교가 어떤 대입 결과를 만들어냈는지 살피느라 본질적인 요소, 그러니까 ‘아이가 행복할 수 있는 곳인가’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는 것은 다르다. ―누가 정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장작 화덕을 사용하고 크러스트 두께는 2cm이하인 그런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이라 믿는 이에게, 또띠아로 간편하게 만든 사랑을 내밀어 무작정 마르게리타라 인정해달라고 떼를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랑받고 싶다면, 그 지구인이 사랑할 수 있는 그런 피자가 되는 게 맞다. 대신, 정통 마르게리타만 사랑받을 거란 오해는 하지 말자. 이런 피자를 즐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런 피자를 즐기는 사람도 있을 테니 말이다. 나도, 당신도, 충분히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다.
나의 마르게리타는 세상이 정한 그 ‘정석’에서 언제나 벗어나 있을지도 모르겠다. 화덕을 갖출 자신도 없고, 직접 반죽할 용기도 없다. 그저 이런 마르게리타 피자라도 맛있게 먹어줄 그런 사랑이 있으리라 믿으며, 맛은 오히려 더 나을 수도 있다는 것을 강조하며, 그렇게 사는 것도 굳이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앞으로 우리의 사랑은 어떤 모양, 어떤 빛깔일까. 궁금하긴 하지만 걱정하진 않으련다. 사랑의 본질은 변하지 않으므로 있는 힘껏 당신을 사랑하며 그렇게 살아가면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