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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르기 정보까지 알려준다고요?

급식에 충성하는 자, "給食, 忠"

by 웅숭깊은 라쌤

알레르기 정보까지 알려준다고요?

: 급식은 생각보다 꽤 친절합니다



“우리 애는 유기농을 먹여야 해요!”

드라마가 아니었다. 꿈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다른 동네 다른 학교 다른 교실 다른 교사도 아니었다. 손에 들린 수화기 너머에서 잔뜩 힘을 주어 외치는 목소리는 한 치의 망설임이 없었고, 그리하여 나의 답은…… 그냥 없었다. 여기서 대체 뭔 말을 할 수 있담? 당황하여 초짜 교사 티를 쏟아냈던 그때를 떠올리면 여전히 나의 밤은 ‘이불킥’으로 가득하다. 나이가 들고 경력이 쌓였으며 성깔이 생길 대로 생긴 지금은 물론 무슨 말이라도 하겠지. 이젠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우리집 개는 물어요!


10.jpg 글과 이미지는 전혀 관련이 없으나 하여간에 제가 먹는 급식이긴 합니다


학교 홈페이지에는 한 달 치 식단표가 공개되어 있는데, 가장 상단엔 이러한 문구가 숫자와 함께 제시되어 있다.


알레르기 정보 :


1. 난류 2. 우유 3. 메밀 4. 땅콩 5. 대두 6. 밀 7. 고등어 8. 게 9. 새우 10. 돼지고기 11. 복숭아 12. 토마토 13. 아황산류 14. 호두 15. 닭고기 16. 쇠고기 17. 오징어 18. 조개류(굴,전복,홍합 포함) 19. 잣



말 그대로 알레르기 정보. 그리고 각 메뉴에는 메뉴마다 해당하는 식재료의 알레르기 정보가 함께 담겨 있다. ‘흑미밥, 소고기무국 (5.6.16), 근대된장나물 (5.6), 곱도리탕 (5.6.10.13.15), 배추김치 (9), 파인애플’, 이런 식. 학생들 개개인이 건강에 이상 반응이 올 수 있는 메뉴를 미리 확인하고 이에 대처할 수 있게 한다는 취지이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지만, 세상에 당연한 게 어딨습니까? 세상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풍조는 분명 문제다. ‘당연하다’가 아니라 ‘감사하다’가 먼저여야 하니까. 물론 윗사람 혹은 업무 담당자의 입에서 나올 소리는 아니다. ‘여러분, 이 정도면 잘해드리는 거예요. 감사하세요!’란 식의 마인드를 가진 관리자는 자격 미달! 본인을 믿고 따르는 이들의 불편을 먼저 헤아리는 태도가 필요하다. 어쨌거나 말이다, 이 정도면 우리네 세상, 특히 급식의 세계는 꽤 친절한 편이지 않은가!

이러한 친절이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급식의 질이 매우 낮았던, 그저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던 시절도 있었고, 급식실이 따로 없어 ‘도시락 급식’이 시행되던 때엔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알레르기고 나발이고 잔반을 절대 남기지 못하게 하는 악성 담임교사도 있었다. 미역 알레르기가 있던 친구가 눈물을 펑펑 쏟아내며 억지로 미역국을 목구멍에 때려 붇던 그 장면이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그리고 또 언제부턴가 교실에 식단표를 게시하는 것이 필수적인 행위가 되더니 이젠 한 달 치 식단이 사전에 공개되고 학생들의 입맛과 영양을 모두 고려하는 그야말로 ‘완성형 급식’의 시대가 열렸다.


‘나’라는 개인을 위해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집단 내에서 우리는 모두 하나의 구성원이며 모든 시스템이 날 위해 맞춤형으로 운영될 순 없는 노릇. 그건 집에서 혹은 내 방에서나 가능한 부분이다. 호의가 계속되면 둘리, 아니 권리인 줄 안다며 소리치는 영화 속 어느 인물의 명대사가 떠오를 정도로, 우린 친절함에 대한 잘못된 반응을 자꾸만 키워내고 있다. 불편함이 견디기 불가능한 수준이 아니라면, 그 불편함을 조금은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유기농이 아니어도 충분히 급식은 건강하고, 맛도 훌륭한 데다가, 개개인의 건강을 위한 고민까지 담겨 있으니까.

사실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지만 이걸 젤 못하는 사람이 나 자신이긴 하다. 성깔이 생길 대로 생긴 지금 건드리면 물어 버릴 기세로 살아가고 있으니까. 결국 이 글은 반성적 사고에서 비롯된 다짐의 글이니 지적한답시고 괜히 건드리면 물…… 론 감사하며 받아들이려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당연한 것은 없으며 비록 당연하게 여겨지더라도 ‘감사하다’가 먼저인 세상이 훨씬 더 아름답고 찬란할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이 아름다움은 우리 마음속에서 시작되는 거겠지? 지난 하루, 지난 나날들을 떠올려보면 은근히 감사할 일들이 참 많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전 열림 버튼을 누르고 내가 올 때까지 기다려준 같은 통로 주민, 좁은 골목에서 먼저 지나가라고 양보해 준 반대편 차량의 운전자, 늘 밝고 아름다운 미소와 함께 행복한 메시지를 건네주는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 날 걱정하고 응원하며 아껴주는 가족까지. 급식이 생각보다 꽤 친절하단 사실처럼 우리 주변엔 감사해야 할 이들이 꽤 많다는 걸 꼭 알아주었으면 한다.

참, 그리고 이 글을 읽어준 당신께도 무한한 감사를 전합니다. 배부르고 등 따신 하루 보내세요!


10. 완성형 급식.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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