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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식보단 급식입니다

급식에 충성하는 자, "給食, 忠"

by 웅숭깊은 라쌤

회식보단 급식입니다

: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 급식의 세계



경기도의 모 국어교사가 선정한 최고의 고전 소설, 박지원의 <허생전>이다. 특정 개인이 선정한 것이므로 지극히 주관적이며 혹여나 문제를 제기하신다면 아마 그 말이 다 맞을 겁니다!

<허생전>을 최고의 고전 소설로 선정한 이유는 이 작품이 완벽해서가 아니다. 학생들과 나눌 수 있는 논제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작품 속 주인공 허생은 ‘매점매석’의 방식을 통해 조선의 취약한 경제구조를 비판하지만, 변씨에게 돈을 갚는 장면에선 ‘당신은 나를 장사치로 보는가!’라는 말을 뱉기도 한다. 이것이야말로 허생의 역설. 상공업 발전을 주장하지만 상인은 ‘장사치’라며 비하하는 장면에서 이중적인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실학자들 역시 국가 발전을 위한 다양한 개혁 정책을 내놓으며 실학이 곧 ‘시대정신’임을 펼쳤으나 <목민심서>로 잘 알려진 정약용은 조선이란 국가가 가진 가장 심각한 문제점인 차별, 계급제도에 대해선 오히려 강화해야 함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실학은 시대정신일까? 다시 말하지만 특정 개인이 선정한 것이므로 지극히 주관적이며 혹여나 문제를 제기하신다면 아마 그 말이 다 맞을 겁니다! 분명한 건 이러한 이야기가 충분한 논쟁거리가 될 수 있고 토론 수업으로 이어지기에도 매우 적합하단 점이다.

앞서 소개하였듯 허생은 매점매석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데, 그때 활용한 물품은 ‘과일’과 ‘말총’이었다. 조금 의아할 수 있는 장면이다. 기왕이면 쌀을 샀으면 어땠을까? 과일은 안 먹어도 그만이고 말총은 망건을 만드는 재료라지만 결국 대체품이 있을 것만 같은 기분. 쌀은 없으면 안 되는데? 부르는 게 값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아뿔싸, 그랬다! 작가 연암 박지원은 이 장면을 통해 단순히 매점매석이 가능할 정도로 취약한 조선의 경제구조를 비판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조선이란 나라에 뿌리 내린 ‘허례허식’까지 비판하고자 했던 것이었다! 왜 상다리가 부러지게 음식을 차려야 하나? 제사상에 과일이 빠져선 안 되나? (내 제사상엔 치킨, 피자, 마라탕, 이런 음식이어도 충분하다) 왜 꼭 상투를 틀어야 하나? 조선 시대 남성들은 스포츠머리로 시원하게 빡빡 밀면 안 되는 건가? 알겠지만 조선이란 나라에선 이 모든 게 불가능했다.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썩은 예법이 존재했으며 이것이 비판의 대상이란 걸 아는 우린 ‘허례허식’이란 타이틀을 붙인다. 조선이 멸망하고 일제 강점기를 거쳐 새로운 국가가 성립되었음에도 여전히 그 허례허식에 휩싸여 명절 때마다 고생하시는 우리네 어머님들을 떠올리면 참 고집이 센 민족이란 생각도 든다. 고집이라기보단 지독한 생명력이라고 해야 하나?

16.jpg 글과 이미지는 전혀 관련이 없으나 하여간에 제가 먹는 급식이긴 합니다


민족 고유의 전통은 지키고 전승해야 하는 것이 맞지만, 잘못된 악습은 하루라도 빨리 없애거나 ―없앨 수 없다면― 고쳐나가야 하는 것이 도리다. 안타깝게도 집단의 문화에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역시나― 지독한 생명력을 지닌 장면들이 여전히 곳곳에 녹아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회식 문화. 술자리의 이해할 수 없는 ‘주도’에 관해 아마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볼까?


첫째, 술을 따를 때는 라벨을 가려야 한다? 아무도 그 이유를 말해준 이가 없다. 대체 왜지. 어른들껜 PPL 논란이 생길 수 있단 뜻인가. 누가 알면 제발 좀 알려주세요! 둘째, 상대가 술을 따라주면 받은 술잔으로 입술을 적셔야 한다? 이거 먹기 싫다는 의미인 거 아녜요? 누가 알면 제발 좀 알려주세요!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이것, 바로 잔 돌리기! 윗사람에게 잔을 채워드리고 마시면 다시 잔을 돌려받아 그 잔을 다시 채워 받아 마시는 그 문화. 서로의 친밀도를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하는데 여러분, 모 대학 교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잔 돌리기를 통해 바이러스 특히 간염이 전파될 수 있다고 하네요. 이건 정말 멈춰야만 합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슬프고 힘든 회식은 ‘점심시간 회식’이다. 학기 말에 같은 학년이나 같은 교과 선생님 등 소위 ‘회비를 떼는’ 집단의 회식이 급히 이뤄지는 때가 있다. 아마도 회비 정산을 위해 돈을 써야 해서 억지로 점심시간에 잡혔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집단에선 잘못된 문화로 인한 불편함이 있진 않다. 아마 불편함이 있었으면 회비 자체를 내지 않았겠지? 다만 이럴 땐 안타깝게도 급식을 포기해야만 하는 슬픔이……. 게다가 점심시간이 그리 여유롭지 못한 교사의 삶이다 보니 한번 나갔다 오면 그만큼 더 바쁘고 정신없는 오후를 보내야 하고, 애초에 회식을 고급 뷔페에서 하지 않는 한 급한 메뉴 선정에 대한 구성원들의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발생하기도 한다. 급식이었다면 주는 대로 먹으면 되는데 말입니다, 다툴 일이 없겠죠?


점심시간에 이뤄지는 회식은 허례허식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이야기지만, 어쨌거나 급식 안엔 급함 대신 여유가 있고, 갈등 대신 수용이 있다. 게다가 급식 안엔 회식 자리에서 겪게 되는 불편함의 장면이 없다. 윗사람과 식판을 부딪치며 건배사를 할 필요도 없고, 굳이 국물 한 숟갈을 떠서 입술을 적시지 않아도 된다. 그렇다고 급식실이 모든 예의범절이 사라진 난장판이 된 것도 아니다. 어찌 이토록 완벽할 수 있단 말인가!


차조밥, 꽃게탕, 취나물 된장무침, 삼겹살 구이와 배추김치.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으면서 고른 영양까지 갖춘 오늘의 식단. 가장 이상적인 건 회식이 급식처럼 흔들림 없는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 되는 것일 테다. 뺄 건 빼고 지킬 건 지키면서 마치 급식의 세계가 그러하듯,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회식의 세계가 펼쳐지길 기대해 본다. 혹시 모든 불편함을 감내할 수 있는 아주 값비싼 고품격 메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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