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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건축가 Oct 14. 2022

마지막 이야기

건축소설: 내 집을 지어보고 싶습니다 # 29

 


수눌당- 승효상

승효상의 주택 대표작 중 하나. 역시 전망 좋은 고지대에 나지막한 메스를 앉힌 건물이다. 상부에 사선형의 지붕 형상을 도입한 것이 특징이다. 아마 주변 지형을 고려한 제스쳐가 아닌가 한다. 1층 같은 성격의 지하공간을 최대한 넓게 퍼트리고 그 안에 각종 중정과 데크 등을 설치하여 주변 지형과 최대한 어울리도록 하였다. 


이미지 출처: https://happist.com/13115/%EB%B9%84%EC%9A%B0%EB%A9%B4-%EC%B1%84%EC%9B%8C%EC%A7%84%EB%8B%A4-%EA%B1%B4%EC%B6%95%EA%B0%80-%EC%8A%B9%ED%9A%A8%EC%83%81



다음날 아침. 강식은 어느 때 처럼 아침 일찍 사무실로 출근했다. 언제나처럼 깨끗하게 정리된 책상을 보니 마음이 상쾌하다. 사실 어제 밤 내내 수경을 얼굴을 떠올리려고 애쓰다 밤잠을 설친 터였다.


‘그냥 잊어버려도 되는데.. 왜 이렇게 마음이 쓰이는지 모르겠네. 뭔가 나쁜 일로 얽혔던 사람인가..’


저 멀리 책장 위 사진에 눈길이 간다. 예전 이정희 선생님 사무소에서 일하던 시절 동료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얼마 전 불의의 사고로 작고하신 홍준성 선배의 얼굴도 보이고, 친형제처럼 동고동락하던 설민국의 얼굴도 보인다. 예전 사무실의 추억 때문에 항상 곁에 두고 보는 사진이다. 그 때 강식의 머리 속에 예전 기억이 퍼뜩 떠올랐다.


‘아.. 아! 맞다! 그래! 그 사람이었어! 00기업!.. 아, 아.. 그래서.. 그래서 그 사람이 민영이에게 연락을 한 거였구나.. 그래, 그랬던 거였어..’


강식은 마침내 수경의 얼굴이 누구인지 떠올랐다. 그리고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점심을 먹고 한참을 고민하던 강식이 무언가 결심한 듯 전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00기업 양수경 대표님 사무실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건축가 최강식이라고 합니다. 양수경 대표님 사무실 맞는지요?”

“대표님 지금 자리에 안계십니다. 혹시 급한 용무이신가요?”

“네.. 저는 최강식 건축사사무소 대표구요. 어제 양 대표님을 만나 뵈었습니다. 아무튼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

“음.. 그렇게만 말씀하시면.. 어떤 이야기일까요?”

“음.. 아. 그래. 설민국이란 사람을 아시는지 여쭤봐 주세요.”

“네?”

“그렇게만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아시면 저에게 전화 좀 부탁드린다고 전해주세요.”

“아, 네..”


수경의 사무실에는 워낙 많은 전화가 걸려오기 때문에, 수경의 비서는 모든 전화를 수경에게 연결해줄 순 없다. 일단 자리에 없다고 하고, 내용을 들어보고 다시 연락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하지만 오늘 같이 누굴 아느냐고 물어보는 사람은 처음이다.


‘건축가라는 사람이, 사람을 아냐고 물어보라고? 참 황당한 사람이네.. 아무튼 대표님께 말씀은 드려야겠지..’


“대표님, 방금 최강식이라는 사람에게서 전화가 왔는데요.”

“누구, 최강식? 아.. 어제 왔던 그 건축가.. 그 사람이 왜 나를 찾지?”

“그게.. 설민국이란 사람을 아느냐고 물어봐달라고.. 알면 전화 달라고 하던데요..”


수경은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 사람이 뭔데 민국씨를 알지? 어떻게 알고 나한테 전화를 한 걸까? 

“그래.. 알았어요. 내가 전화 해볼게요. 번호 알려주세요.”


한참을 생각하던 수경이 이윽고 전화기 화면을 누른다.

“안녕하세요, 건축가님. 저 양수경입니다. 어제 뵈었던..”

“네, 대표님 안녕하세요. 최강식입니다. 어젠 경황이 없어서 축하인사도 못 드렸습니다.”

“네? 무슨 축하인사를..”

“이제 곧 며느리를 보게 되셨잖아요. 민영이가 아드님과 결혼 준비 한창이라던데요.”

“아, 그 이야기.. 아무튼 그리 됐네요. 감사드립니다.”

“그 이야기 드리려고 전화 드린 건 아니고.. 사실 민국이.. 설민국 소장 이야기 하려고 전화 드린 겁니다.”


수경이 한참을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민국씨.. 아니 설민국 소장을 어떻게 아시죠?”

역시.. 이 사람은 민국이를 알고 있어.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대답할 수가 없지.


“민국이는 저랑 예전 이정희 선생님 사무실에서 동고동락 하던 사입니다. 친형제보다 친했다고 할 수 있죠. 저도 사무실을 내고 그 친구도 사무실을 냈지만.. 전 비교적 잘 됐지만 그 친구는 사업 수완이 없어서 잘 안됐죠..  고생 고생하다가 10년 정도 전에 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

“그 친구가 이정희 선생님 사무실에서 주택을 하나 맡아서 한 적이 있었어요. 00기업 양 대표님 사옥.. 평창동에 있는.. 그 때 여자 친구가 생겼다고 했었어요.”

“...그랬겠죠.”

“그 때 민국이랑 민국이 여자 친구랑 한 두 번 얼굴을 본적이 있었습니다. 어제 양수경 대표님을 보니 어디선가 본 듯한 생각이 떠나질 않았어요. 밤새도록 기억해보려고 해도 떠오르질 않았는데.. 오늘 사무실 와서 민국이 사진을 보니 퍼뜩 떠오르더군요. 그때 민국이가 데려온 여자 친구가 바로 양수경 대표님이었어요..”

“...”

“그 때 민국이는 정말 열정적으로 일했어요. 거의 매일같이 땅에 찾아가기도 하고, 밤 새도록 스케치를 하기도 하고.. 그러던 와중에 건축주 따님을 만났다고 하더군요. 00기업 유대표님 따님.. 어떻게 해서 대화를 해보니 정말 잘 맞기도 했고, 주말에 따로 만나 데이트도 하다 보니 어찌 어찌 사귀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민국이랑 너무 격이 안 맞았던 게 문제였어요. 민국이는 가난뱅이 건축가 지망생이었고, 여자 친구은 잘나가는 부자집 딸이었으니...”

“....”

“그렇게 몇 달을 고생하고, 공사해서 주택은 잘 완성됐지만.. 민국이는 그 여자 친구랑 헤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자친구 집안의 반대도 심했고.. 민국이 스스로도 여자 친구에게 맞는 남자인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정말 괴로워했죠. 저 붙잡고 밤새도록 술마신 날도 많았습니다.

“그랬을 거에요, 민국씨 성격에..”

“아시겠지만, 그 민국이 딸이 민영입니다. 민국이 소개로 제 사무실에서 일하게 됐고.. 한 삼년 정도 하다 나갔지만 정말 성실하고 잘 하던 친구였는데.. 사무실에서 사귄 남자친구랑 좀 문제가 있어서.. 최근까지도 고생했다고 하더군요. 아무튼 대표님 아드님 만나 잘 되었으니 정말 다행입니다. 저도 잠깐 보았지만, 인상도 좋고 건실하게 좋은 친구인 것 같더군요.”

“그렇게 봐 주시니 감사합니다.”

“아무튼 제 이야기가 맞나요? 확인 차 전화를 드렸습니다.”


작은 한숨을 쉬고 수경이 말을 이어갔다.

“네 맞아요. 기억력이 참 좋으시네요. 전 사실 어제 뵙고 예전 그 분이란 건 정말 몰랐어요. 제가 사람을 하도 많이 보니 그랬을 수도 있고..”

“그럼, 민영이가 민국이 딸이란 것도 알고 연락하신 겁니까?”

“맞아요. 민국 씨 소식은 대충 알고 있었는데.. 딸이 사무실을 개업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떤 방식으로든 도와야 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연락하게 된 거에요.”

“음.. 집은 정말 잘 나왔던데.. 어떻게, 만족하십니까?”

“물론이죠. 민국 씨와의 관계를 떠나서, 정말 만족하고 있어요. 민국 씨보다 딸이 설계를 더 잘하는 게 아닐까 생각될 만큼..”

“하하. 그렇게까지.. 민국이 그 놈이 좀 고집이 있어서.. 대중적인 스타일의 설계를 안하긴  했죠..”

“전 그런 고집스러운, 예술가 스러운 성격이 좋았어요. 그래서 그 사람이랑 사귀게 된 거고..”

“그랬군요. 그래도 민국이 그 놈을 정말 좋아하긴 하셨나봅니다.”


수경은 전화 통화지만 자세를 바로잡고 말했다.

“민국 씨는 제 평생 진심으로 사랑한 유일한 사람이에요. 그건 제 명예를 걸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아, 그렇게까지..”

“집안 반대가 너무 심해서 헤어지긴 했지만.. 그 땐 아버지가 호적을 판다, 집에서 쫓아 낸다 거의 집안을 뒤집어놓으실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그 때 그렇게 물러났던 것이 제 인생에서 가장 후회스러운 부분이에요. 그 후에 몇 개월 만에 다른 기업 아들과 정략결혼을 해버렸으니까.. 아버지도 제가 민국 씨를 못 잊는다는 걸 아셨던 거에요. 그래서 서둘러서 결혼을 시켜 버리신 거고..”

“그랬던 거군요.”

“그 뒤로 민국씨도 다른 여자 만나서 결혼을 했고..”

“그래서 민영이를 낳았던 거구요.”

“아무튼 그 뒤로도 어떻게든 민국 씨를 도와주려고 했지만.. 주변 눈치도 있고 민국 씨 자존심이 그런 걸 허락하지도 않을 것 같아서.. 아무튼 그렇게 어물쩍거리다 시간이 갔네요. 그러다 갑자기 민국 씨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죠.”

“음..”

“이렇게 민국 씨를 떠나보낼 수 없다는 생각을 계속 해왔는데.. 딸이 설계사무소를 개업했다는 소식을 듣고 결심을 했어요. 여기서 뭔가 도와줘야겠다고..”

“그런 스토리였군요. 알겠습니다. 부모님 대에서 이루지 못한 인연을 자식들이 잇게 되었네요. 소감이 남다르시겠습니다.”

“만감이 교차하는 건 맞아요. 이런 게 사람 인연인가 싶기도 하고.. 민영이에게 잘해줘야 되겠다는 생각도 많이 하죠.”

“아이들은 이런 얘기 모르는 것 같던데. 언제 얘기하실 생각입니까?”

“사돈 댁이 이런 이야기 아시면 좋아할 리 없으니까.. 최대한 이야기 안하려고 하는데. 상황이 되면 알려줄 수도 있겠죠. 아무튼 결혼식 올리고 나면 기회 봐서 해주려고 합니다. 아무튼 결혼식 치르고 생각해 보려구요.”

“그렇군요. 저도 그럼 일단 비밀로 하고 있겠습니다.”

“민영이 에게는 이야기 안하신거죠?”

“네, 일단 대표님께 확인해보려고 먼저 전화 드린 겁니다.”

“그럼 민영이 에게는 민국 씨 이야기 비밀로 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최강식 건축가님 몇 번 안 뵈었지만, 믿을 만한 분인 것 같아요. 믿어도 되는 거겠죠?”

“네. 저도 입은 무거운 편이라서. 그런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아무튼 감사합니다. 이렇게 민국 씨를 기억하는 분과 만나게 돼서 저도 좋네요..”

“저보다 민국이를 잘 아는 사람이 있을까 싶긴 합니다.. 하하. 아무튼 민영이 결혼식 날 뵙겠네요. 그 날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수경은 의자에서 일어서서 창 밖을 바라봤다. 이렇게 민국 씨를 아는 사람이 나타나다니, 세상 인연은 참 모를 일이다. 정말 신이라는 게 있어서, 사람 인연을 관장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수경은 신을 믿지 않지만, 이번 일을 겪으면서 진심으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또 하나의 집이 지어지고 또 하나의 이야기가 완성되었다. 세상에는 수많은 집과 건물들이 있다. 조금은 초라하고 볼품없는 것도 있고, 정말 화려하고 돈도 많이 들어간 멋진 건물도 있다. 하지만 뭐가 됐든, 각자의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든, 각자의 사연을 품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가진 것 하나 없는 서울역의 부랑자부터, 어마어마한 대기업의 회장님까지 사람의 수준이나 지위와는 상관 없이 모두 삶의 이야기들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참 사람과 집, 건축은 비슷한 데가 있는 것 같다. 결국 건축도 사람이 설계하고, 사람이 짓기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다. 그 집은 건축주, 설계한 사람, 시공한 사람들을 닮아가게 된다.


오늘부터 지나가는 건물들을 보시면, 항상 보던 건물이라고 지나치지 말고 그 뒤에 있는 이야기는 어떤 것일까 상상해보는 것은 어떨까. 민영과 수경, 지훈의 이야기보다 더 재미있고 흥미로운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열린 설계와 소통으로 건축주, 시공사와 함께하는 건축을 만들어갑니다.


OPEN STUDIO ARCHITECTURE

글 쓰는 건축가 김선동의 오픈 스튜디오 건축사사무소


김선동

Kim Seondong

대표 소장 / 건축사

Architect (KIRA)

M.010-2051-4980

EMAIL ratm820309@gmail.com

www.openstudioarch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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