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돼야 알 수 있는 것
이사를 하고 한동안 집 밖을 잘 나서지 않았다. 아직은 코끝이 시린 날씨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삿짐 정리로 한가로이 마당을 거닐 새가 없었다. 정신없는 와중에 첫째의 등하원을 위해 밖을 나서면 점점 계절이 변해감을 느꼈다. 어제까지만 해도 차갑게 스치던 바람에 점점 온기가 더해져 어느새 봄 냄새가 물씬 풍겼다.
우리가 처음 이 집을 보러 왔을 때 마당은 그저 마당일 뿐이었다. 마당이 있어서 참 좋다는 생각이 전부였다. 조금씩 날이 풀리며 우리 집 마당은 조금씩 모습이 변해갔다. 내가 전혀 상상하지도 못한 모습으로...
“여보! 이거 벚꽃 아니야?!!!”
어느 날,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남편을 불렀다. 우리 집 앞마당에 있는 커다란 두 그루의 나무에서 꽃망울이 터지고 있었다. 그게 벚나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애초에 그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궁금해한 적도 없었다. ‘내가 누군지 보여주겠어’라는 기세로 나무는 꽃을 피웠다. 만개한 벚나무를 넋이 나간 채 바라보았다. 우리 집 마당에서 벚꽃구경을 하게 될 줄이야.
“내일 비 많이 온대. 꽃 다 떨어지기 전에 애들이랑 사진 찍자”
보기와 다르게 로맨틱 가이인 남편이 말했다. 나는 부랴부랴 삼각대를 챙겨 나왔다. 후줄근한 츄리님 차림이지만 우리는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가족사진을 찍었다. 집 앞에서 가족사진이라니... 아파트에 살았다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다. 봄은 우리에게 이토록 찬란한 순간을 선물해주었다. 꽃잎이 흩날리고, 아이가 꽃잎을 따라 팔랑거리며 뛰노는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매년 봄마다 이런 풍경을 선물 받을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우리 집 텃밭 담당 남편은 시간만 나면 마당으로 나갔다. 밭을 갈고 비료를 주고 비닐을 씌우고... 구획을 나누어 무얼 심을지 정했다. 남편은 한번 바깥에 나가면 텃밭을 매만지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텃밭 정비를 끝낸 남편은 나를 불러 브리핑을 시작했다.
“자, 여기에 상추를 심고 여긴 오이를 심을 거야. 파는 이쪽, 저긴 고추. 네가 좋아하는 가지는 몇 개 심을까?”
남편과 나는 무슨 모종을 몇 개 살 것인지 빼곡히 적어 들고는 오일장에 갔다. 장터에는 모종을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우리는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남들은 뭘 사나 구경하는 재미에 빠졌다. 가장 장사가 잘 되는 모종 가게에 가서 모종을 샀다. 남편은 모종 쇼핑에 들떠 계획하지 않은 모종까지 사들였다. 두 손 가득 모종을 사들고 돌아온 남편은 또 한 나절 텃밭에 앉아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상기된 얼굴로 웬 풀떼기 다발을 들고 들어왔다. 벌써 뭐가 나올 리가 없는데 뭘 따 가지고 들어오는 건가 싶었다.
“뒷마당에 두릅이 있어! 나무에서 순이 올라오길래 자세히 보니까... 두릅이더라?!!”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남편이 따 온 그 풀떼기를 받아 들었다. 향긋한 봄내음이 느껴졌다. 아니 내 집 마당에서 두릅이라니?!! 벚꽃에 이어 두 번째 행복한 충격이었다. 덕분에 우리는 마트에서 내 돈 주고 절대 못 사 먹을 두릅을 원 없이 먹었다. 아마 내가 텃밭관리자였다면 두릅나무인 줄도 모르고 지나쳤을지 모른다. 시도 때도 없이 텃밭에 나가 주변을 살피는 남편의 정다운 시선 덕분에 봄의 선물을 받을 수 있었다.
봄은 우리의 모든 감각을 깨운다. 이곳저곳에서 피어나는 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하루가 바쁘다. ‘우리 집 마당에 저런 꽃과 풀이 있었구나!’ 식물들은 각자의 존재감을 뿜어내느라 바쁘고 우린 매일 놀라움의 연속이다. 봄꽃은 향기롭고 봄바람은 부드럽다. 봄날에만 먹을 수 있는 갖가지 나물들은 입맛을 돋운다. 밤이 되면 개구리 소리가 쉼 없이 울려 퍼진다. 잠자리에 누워 개굴개굴 소리를 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든다.
시골의 봄은 너무나 환상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