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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우 Oct 07. 2024

해체할 결심

나의 가장 못난 부분도 가장 아름다운 부분도 이 사람에게서 왔다.

호를 그리며 8시 20분을 가리키는 눈매와 입매, 소처럼 크고 순한 검은 눈동자와 짙은 쌍꺼풀, 숱이 거의 없어서 반딱반딱한 눈썹, 한 주먹을 차지하는 통통한 복코. 고등학교 졸업식에 늦어서 헤매고 있던 아빠에게 “유정이는 7반이에요.” 하고 친구가 길을 알려줄 만큼, 가족 중에서도 아빠와 나는 유독 닮은 멤버다. 친절하지만 냉랭한 마음도, 궁서체로 눌러쓰는 글씨체도.


‘전화 한 통 해라.’ 아빠의 카톡이었다. 찌는 듯한 8월의 더위, 뒤늦게 코로나에 걸려 누워있었다. 아빠가 마지막으로 내 카톡에 답장한 게 언제더라? 5년, 아니면 6년 전? 좋은 소식일 리 없지만 힘을 쥐어짜서 전화를 걸었다. 열에 달뜬 머리는 어지럽고 입술은 이면지처럼 버석거렸다.   


- 잘 사나?

- 어. 코로나 걸려서.


마치 6시간 전 안녕한 부녀처럼 통화를 해본다. 힘들다, 보고 싶다, 사랑한다는 내 말에 한 번도 답장 없던 아빠가 전화한 이유는? 한 달 뒤 동생의 결혼식 때문이었다. 20년을 친가와 연을 끊고 살았고 엄마와 아빠가 매우 터프하게 이혼한 지금에 와서, 친가에 인사하러 오라는 아빠의 전언으로 아빠는 병크 멤버가 되었다. 혼주석의 엄마 옆자리는 내가 되었다. 우리가 전 멤버인 아빠에게 동생의 결혼 소식을 알리고 초대한 까닭은 전 가족 멤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하지만 우리 가족의 구 멤버는 최대한의 도리를 하고 싶은 경상도 유교 논란으로 병크를 터뜨렸다.


아빠는 다정한 사람이다. 단 한 번도 나를 혼내지도, 언성을 높이지도 않았다. 나한테 아빠는 세상에서 제일 무섭지 않은 사람이었다. 아빠는 나라면 껌뻑 죽었다.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어 그 사랑을 듬뿍 표현할 줄도 몰랐지만, 아빠가 나를 얼마나 깊이깊이 사랑하는지 늘 느끼면서 살았다. 그 사랑이 나를 살리고 죽였다.


아빠는 숨 쉬듯 바람을 피우는 사람이었다. 쉽게 타인의 호감을 산다. 거기에 어떤 악의가 있었던 것 같진 않다. 타인의 호감은 마취제 같은 것이라, 호감을 산다는 행위 자체를 오락처럼 여겼던 것 같다. 술도 마시지 않고 별다른 취미도 없지만, 여자는 끊이질 않았다. 최근에 나도 약간 아빠의 피가 흐르고 있군, 이라고 느끼는 지점들이 있었다. 나도 순수하게 타인이 원하는 내가 되는 순간, 호감이 극대화되는 순간을 즐긴다. 그런 것들이 재미있게 느껴진다. 앞에 앉은 상대의 이름도 생각나지 않아도 세상 좋은 사람처럼 웃을 수 있다. 높은 확률로 나는 쉽게 호감을 산다. 남들 눈엔 내가 꼬인 것 없는 쉬운 상대로 보이는 탓도 있을 것이다. 나는 어떤 인간이 될까. 선택의 문제다. 나의 가장 못난 부분도 가장 아름다운 부분도 이 사람에게서 왔다.   


아니, 그냥. 하소연할라고 전화했다.


아빠는 평생을 피워온 담배를 한 모금을 깊이 내뱉으며 말했다. 어렸을 적 세발자전거를 타고 담배를 사러 가던 어린 내 모습이, 낡은 필름 영화처럼 스쳤다. 아, 하소연. 마음 저편에서 기타줄이 팅, 끊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실망시킬 때, 내가 필요한 때에 곁에 없을 때, 내 마음을 찢어놓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빠 인생의 고통을 다 헤아릴 수는 없다. 아빠도 내가 얼마나 고통받았는지 다 알 수 없겠지. 사랑하는 아빠, 불쌍한 아빠. 아빠를 많이 닮은 만큼 아빠에 대한 나의 유대감과 연민은 남달랐다. 모든 가족관계가 파탄 나는 순간에도 나는 아빠가 돌아올 자리를 비워두었다.


아빠는 아무것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저 남은 생을 시끌벅적하게 소진할 것이다. 아빠가 할아버지와 다르게 살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안다. 술을 마시지 않고, 아들을 낳지 않았다. 아빠는 딸이 둘인 것을 무척 만족스러워했다. 아들을 낳지 않는 것으로, 할아버지와 아빠에게로 내려오던 저주를 끊어내는 양. 하지만 지금 아빠는 할아버지가 살았던 생을 리메이크한다. 할아버지는 60년을 살지 못하고 죽었다. 텅 빈 집에서 홀로. 부인과 자식들이 모두 그에게서 등을 돌린 채로. 쉰아홉에 반듯하게 잠든 그대로 죽은 할아버지, 살아 있는 모든 순간에 주변에 고통을 선사한 사람. 아빠, 아빠는 할아버지와 다르게 살기 위해 그렇게 애썼는데 왜 같은 길을 가고 있어?


전격적으로 해체할 결심을 한다. 아빠와 내가 추구하는 삶의 방향이 달라져서, 더는 같은 멤버일 수가 없다. 남은 날들은 솔로 활동에 집중하기로 한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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