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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작가 Nov 20. 2022

20200703 금요일: 주치의를 기다리는 날

첫번째 입원: 20200630~20200711


언니 노릇하기 힘들다. 병실의 두 친구가 내게 언니, 언니, 하는데 무척 힘이 든다. 참아야 할 것 같아서... 뭔가 억누르고 참아야 할 느낌이 들어서 너무 갑갑하고 싫다. 태주님의 마음 겁나 이해돼ㅋㅋ 시발 태주님 보고싶다. 번호 써 올걸.. 아침에 주치의랑 소아과 선생님이 다녀갔다. 저번에 얘기했던 '터너 증후군' 때문. 이것저것 묻고 내 못생긴 얼굴 사진이랑, 손가락, 발 사진을 찍어갔다. 터너증후군이면 생식능력이 아예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주치의는 아마도 아닐거라고 말했다. 어차피 아닐거 걍 피검사도 안하면 안돼냐.. 제발 아니라고 해죠.. 근데 남친 있었냐거나 성관계 해봤냐는 왜 물어 기분나쁘게ㅜㅜ 아무튼 너무 짜증난다. 피검사 하는것만 아니면 괜찮은데 진심 짜증..ㅜㅜ 근데 주치의는 왜 예전 진료 기록들까지 다 들춰보고 난리일까. 이 병원에서 예전에 수술받고 진료 받았다고는 말 안했는데 어떻게 찾아본건지.. 나름 꼼꼼하네, 이 생각도 들었다.




하루에 맨날 주치의 면담이나 교수 회진만 기다리는 것 같다. 하라는 숙제도 꼬박 하면서 근데 너무 지루하다. 지겹고 지루하고 갑갑하고 답답하고. 병원에 와서 더 나아진건지는 딱히 모르겠다. 죽고싶은 충동이 가라앉긴 했지만 때때로 충동이 떠오르고, 애들 하는 얘기만 들어도 자극되고. 모르겠다 정말. 하. 일기장이라도 없었으면 어쩔뻔했냐.. 혼자만의 마음을 털어놓을 곳이 없다. 주치의 면담도 그냥 형식적인 것 같고, 딱히 내 마음을 알아준다거나 궁금해하는 느낌은 아니라서 공허하다. 왜이렇게 공허한지 모르겠다. 너무 공허해.. 밖에 얼른 나가고 싶은데 동시에 밖에 나가면 또 과복용하고 죽는생각 하겠지 싶어서 걱정된다. 생활이 제대로 될 지.... 혜운과 랄라가 보고싶다ㅠㅠ 토요일 외박하고 싶음ㅜ 나 생각해주는 혜운, 랄라 만나고싶어.. 여기 의사는 너무 기계 로봇같아ㅠㅠ 너무 싫어 ㅜㅜ




주치의가 내 준 숙제. 감정인식활동지 하면서 자꾸 안좋은 기억이 떠오른다. 집단에 대한 기억. 이 기억을 어떻게 정리하고 바로 잡을 수 있을까.. 살인충동. 자살충동. 모든 충동들이 나에게 쏟아진다. 마음이 너무 안좋다. 집단에서 힘든 기억밖에 떠오르지 않아.... 나무님, 반지, 정이. 나를 싫어했던 사람들.... 아 오늘도 하루가 너무 길 것 같아 미치겠다 시발. 아직 10시 밖에 안됐어.. 집에 있을땐 그래도 이렇게까지 시간이 안가진 않았는데.. 우울하다 무척...




오늘 교수님 회진이 11~12시 사이였는데 갑자기 어떤 여자 의사가 와서 심리검사 한다고.. 불려 나갔다. 내가 교수 회진시간이라고도 말했는데 그냥 하자고해서...;;; 결국 검사 도중에 교수가 찾아와서 오늘은 교수 면담은 못했다. 이때 분노가 존나 많이 올라갔다. 아 시발 왜 이시간에 날 불러서 지랄이야. IQ 테스트 하나마나 한 것 겨우 그거때매 묶여있는게 너무나 짜증이 났다. 하.... 그래서 IQ테스트 내내 의욕이 없고 하기 싫어서 대강 하다가 결국엔 어차피 낮게 나올건데 그냥 안하면 안되냐고 말하고 ㅋㅋㅋㅋㅋ 솔직히 마음 같아선 책상 뒤집어 엎고 다 뿌셔버리고 싶었다. 시발 ㅋㅋ 열폭할뻔했다 진짜. 아니 하루가 얼마나 지겹고 긴데.. 교수 회진이랑 주치의 면담만 기다리는데, 하나를 빼앗기니 정말 열이 존나 빡쳤다. 시발!!! 분노 게이지 급상승!!! IQ 테스트는 또 얼마나 머리가 아프던지 시발 ㅋㅋㅋㅋ 간만에 열폭할뻔...ㅠㅠ 다음에 또 회진시간에 부르기만 해.. 부들부들.. 아까 오전에 친구랑 짧게 통화했다. 바로 받아서 존나 놀램.. 면접 때문에 폰 보고 있었다며.. 오늘 면접가는 길이라고 했다. 너무 반가워써ㅠㅠ 어떻게 딱 그 타이밍에 전화를 해서 면접 응원도 해주고 ㅎㅎ 아 근데 아직도 좀 우울하다. 우울우울. 갑자기 비버도 보고싶다.. 여기 있으니 별 사람들이 다 보고싶네 ㅠㅠ 으어어.. 연락처 적어올걸 후회중..




하... 아직 1시 40분 밖에 안됐다. 너무 지겹다.. 교수 면담은 날아갔고, 주치의 면담 뿐인데 너무 지겨워. 토요일에 외출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고싶다. 과연 해줄까. 외출? 혜운 만나러 가고싶어 으어어... 너무 지겹다 진짜.



오늘 주치의 왜 안옴. 숙제 해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ㅅㅂ 짜증난다. 이렇게 기다리는 내가. 존나게 짜증나...ㅠㅠ 시간 약속을 해놓고 있었으면 좋겠어. 하염없이 기다리니까.. 하여튼 스트레스ㅜㅜ 면담만 기다리는데 시발... 로봇같은 새끼. 존나 짜증나게 해ㅠㅠ 면담하러 오라고 빨리!! 시팔.. 언제오냐 진짜ㅜㅜ 짜증나 죽겠어.




아 존나 피곤하다 심리면담. 했던 얘기 하고 또 하고.. 시발 ㅋㅋㅋㅋㅋㅋ 존나 피곤... 오늘 하루 왜캐 하는 일이 많냐ㅠㅠ




6시가 넘었다. 아무래도 안오겠지 주치의.. 나 왜캐 집착이 생기냐.. 지금 집착할 데 없으니까 주치의한테 집착하는 것 같다ㅠㅠ 오늘 안오면 버림받는 느낌 들 것 같아 시발 ㅜㅜ 근데 시간이 퇴근했을 feel.




오늘 힘들었나. 왜이렇게 일기장에 주저리주저리 말이 많냐. 내일 외출은 당연히 안되는거겠지. 아 외롭고 공허하다. 죽어버리고 싶어.. 너무 공허해ㅠㅠ 힘들었다 오늘 ㅠㅠ 시발 왜캐 힘드냐. 힘들때 쏟아놓을 게 이딴 일기장 밖에 없다는 게 또 너무 힘들다.하.. 주말은 어쩌냐ㅜㅜ 면담도 없을텐데 주말 어떻게 버텨ㅠㅠ 죽고싶어질것같다. 으어어.. 주치의가 뭐라고 ㅅㅂ 왜캐 버려지는 느낌일까... 슬프다. 로봇같아도 와줬으면 좋겠다.




간호사가 와서 오늘 어떠냐고 물었다. 하마터면 울 뻔 했다. 처음보다 표정 밝아보여서 좋다는 말에.. 어떤 말도 할 수 없었고 울컥해서 울먹울먹.. 창피하게.. 너무 울먹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휴.. 힘들구나 지금의 나... 힘들다고 느껴진다.




MRI 찍으러 가기 전에 주치의를 만났다. 나 면담할려했는데 내가 검사 들어가서 못했다구.. 그 말 듣고 좀 기분 풀렸다ㅠㅠ 마음이 이렇게 연약해 흑흑. 이따 저녁 늦게 하기로 했다. 몇시에 오실지.. 또 기다린다.. 진짜 할 짓 없고 사람 없으니 주치의만 기다린다 ㅅㅂ 존나 좆같애 이런 기분 ㅠㅠ MRI는 무척 시간이 오래 걸렸고, 길었다.




주치의 면담 드디어 했다! 확실히 면담하면 기분이 좀 나아. 감정인식활동지 쓴 거 같이 얘기하고, 집단 얘기하고.. 뭔가 조금 정리가 되는 느낌. 로봇같던 주치의가 이제 조금 인간답게 보이고 있다. 자꾸 만나서 대화하다 보니 그런것도 같고, 맘이 생기는것도 같고. 모르겠다. 의지할 곳 없어 이러는 것 같기도..ㅠㅠ 이럴땐 내가 좀 안쓰럽다. 전에 랄라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ㅇㅇ씨는 늘 누군가 의지할 대상이 있어야 하는 것 같아. 착ㅡ붙어 있어야 할 대상. 정말 난 그런가보다. 안쓰럽고 짠하다. 주치의와 대화하면서 어떤 면을 더 들어보고싶다, 다음에 또 더 얘기해보자, 하는 말이 기뻤다. 오늘은 시작할 때부터 어떻게 지냈냐고.. 사람들이랑 말도 한다고 들었는데 어떠냐고 물으셔서 좋았다. ㅎㅎ 점점 주치의를 좋아하는 중...





아마 이 날 부터 주치의에게 집착하는 마음이 생겼던 것 같다. 계속 주치의 언제 오는지 그것만 기다리고.. 혼자 안달복달을 했다. 병원에서는 친구도 없고 상담자도 없고 아무도 없기에. 유일하게 내 얘길 들어주는 주치의에게 집착하게 된 것 같다. 집착하는 마음을 알아차리고는 나도 당황하고 짜증이 났다. 꼭 누군가 이렇게 집착할 대상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는거냐고. 스스로에게 채찍직을 한다. 이런 감정 느끼는거 너무 창피하고 싫다고. 이 날 주치의를 내내 기다리다가, 불안하고 버림받는 마음이 들었다고 말하는 대신에 "오늘 안오시는 줄 알았어요" 하고 말했다. 그래도 이 날은 나도 심리면담하러 불려가고, 작업치료 세션도 듣고 MRI 검사도 가느라 바빴으니까. 둘이 시간이 안맞았나보다 하고 생각하게됐다. 6시면 퇴근하고 없을줄 알았던 주치의가 6시가 넘어서도 병동에 있었고, 늦은 시간이라도 나와 면담하겠다고 기다리고 있었으니. 그걸로 마음이 괜찮아졌다. 조금 믿음이 생긴 것도 같다. 선생님은 늦게라도 오신다고. 선생님이 오지 않는 날은 없다고.






이 날은 오후에 작업치료 프로그램도 들었다. 정신과에서 작업치료사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무척 궁금했기 때문에 참여해보았다. 주제는 피천득의 시를 변형하여 자기 것으로 지어 보는 것이었는데. 나름 재미있었다. 아래는 내가 변형한 피천득의 시.




나의 사랑하는 생활


나는 잔디 밟기를 좋아한다.

나는 요리 하기를 좋아한다.

나는 일기쓰기를 좋아한다.


아기의 머리칼 만지기를 좋아한다.

고양이의 털을 만지기를 좋아한다.

야들야들한 풀잎을 만지기 좋아한다.


나는 아름다운 얼굴을 좋아한다.

나는 조용하지만 슬픔이 서려있는 얼굴을 더 좋아한다.

나는 슬픔을 넘어 잔잔하게 웃는 얼굴도 좋아한다.


나는 여름밤에 비가 내리고 난 뒤의 물빛을 좋아한다.

나는 밤이 저무는 색깔을 좋아한다.

나는 비가 떨어지는 소리를 좋아한다.


파릇파릇한 풀이 돋아나는 초록 냄새,

말린 커피찌꺼기 냄새를 좋아한다.

나는 친구와 밥을 먹고 커피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아침에는 깨고싶지 않은 충동을 느낀다.

점심에는 차 한잔과 함께 책을 읽고 싶고,

저녁에는 밤거리를 거닐고 싶다.


나는 여러사람을 좋아하며 아무도 미워하지 않으며,

내게 소중한 사람들을 끔찍이 사랑하며 살고싶다.

그리고 나는 조용하게 늙어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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