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누군가의 악마였으니
얇고 길게 가는 것이 자신의 가치관이라 하셨던 어떤 관리자는 굵고 길게 가면 뭐가 문제냐고 대거리를 하던 나와 자주 부딪혔다.
그는 그의 구성원들이 다 퇴근한 후에도 홀로 자리를 지키고 앉아 부족한 업무를 매우기 위해 고군분투를 하였다. 그의 구성원들이 그에게 미안함이나 불편함 혹은 부채의식 같은 마음을 느꼈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그와 그의 구성원들은 더 오래, 더 많이, 더 열심히 일하는 것이 리더의 역할이고 덕목이라 여긴다는 것을 그들과의 대화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틀린 말은 아닐 수 있다. 리더는 구성원들보다 더 많은 역할과 책임을 갖고 있으니. 그러나, 분업과 협업이라는 업무 절차와 시스템을 활용하는 우리 대다수는 책임과 의무가 질과 양적 차이는 있다고 하더라도 구성원 모두에게 부여된 공통적인 것임을 부인해서는 안된다.
리더의 역할은 조직의 목표를 '함께' 이루는 것에 있다.
때론 코칭과 티칭을, 때론 통제와 관리를, 때론 응원과 배려를 구성원의 역할과 책임 그리고, 업무 여건에 따라서 적절히 행해야 한다. 일방적인 코칭과 티칭, 응원과 배려만으로는 조직의 공통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어렵다.
기술을 요하는 엔지니어링 분야에서는 여전히 도재 방식의 육성이 유효하긴 하지만, 실무를 통해서 얻는 경험 외 숙련자나 전문가에게 필요한 정보는 이제 손쉽게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시행착오 조차 정제된 순도 높은 소스가 공개되어 리더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최근엔 감정을 가진 그리고, 늘 바쁘다는 말을 달고 사는 리더에 비해 화를 내거나 잘난 체 하지도 않으면서 친절하게 원하는 노하우나 소스를 제공하는 인공지능도 현업에서 높은 빈도로 활용된다. 이런 이유로 오랜 시간 '코칭과 티칭'이라는 강력한 권위를 바탕으로 조직을 관리하던 리더십은 상실되고 있으며 오히려, 각자 맡은 업무의 범위(Scope & Scale)와 절차만이 수평적인 관계의 정당성을 부각하곤 한다.
이런 업무 환경에서 리더는 구성원들보다 더 일찍 출근하여 늦게 퇴근하고 더 많은 업무를 책임지는 솔선수범의 가치가 '나 혼자만 힘들면 되지'라는 자기 감정의 통제, 구성원에 대한 지나친 배려 혹은 포기 등의 모습으로 번져 자신을 갈아넣는 셀프 번아웃의 상태로 스스로를 밀어넣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한때 나에게 이런 경우가 있었다.
신임 상급자와 첫 술자리에서 "나는 너희 팀원들이 마음에 안들어, 다 짤라 버렸으면 좋겠어!"
과격한 표현이었고 몹시도 불쾌했지만 실상, 나 역시 인정하는 부분이 있어 이 상급자의 생각을 어떻게 전환시킬지 고심했다.
그리고, 선택한 방법은 솔선수범으로 포장한 헌신이었다.
구성원들의 업무를 대신 해줬다.
보고서나 기획서의 90% 가량을 야근할 때나 주말에 작성하여 담당자에게 전달해 주고, 일부 코멘트만 담당자의 논지와 어투가 베어들도록 코칭했다.
이렇게라도 보여줘야 편견과 선입견을 바뀔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헌신이라는 것이 헌신짝처럼 되어 버렸다. 구성원들의 모든 업무를 대신 해 줄 수도 없었을 뿐더러 내가 한 업무가 항상 100%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는 상황 인식을 함께하고 독려와 응원으로 부서의 펀더멘털을 강화하는 방법을 썼어야 했다.
디지털 지도와 내비게이션을 예로 들면, 리더는 구성원이 알지 못하는 미지(未知)의 영역에 대한 지도를 그려줄수는 있지만 목적지까지의 경로는 구성원과 함께 만들어야 한다. 그 미지 영역의 지도 조차도 순전히 리더의 경험치에 의존하기 때문에 경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리더의 경험치도 새롭게 개선되어야 하며, 그 경로를 함께 달려야 구성원들의 지도도 그들만의 방식으로 만들어 질 수 있다.
"If you want to go fast, go alone. If you want to go far, go together."라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다.
단기적인 목표를 빠르게 달성하려면 혼자 하는 것이 효율적이지만, 장기적인 목표를 이루고 지속적인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협력과 팀워크가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현대의 업무 방식은 그 어느 때보다 분업과 협력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는 물리적인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뛰어넘는다. IT 기술과 비대면 서비스의 활성화가 가능성을 넘어 보편화로 스마트 워크의 세상을 실현해 가고 있다. 때문에, 마치 한 공장에 있는 칸반 시스템과 같이 물리적인 제약을 넘어 각종 협업 도구와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통해 실시간으로 소통하고 일의 진행과정을 모니터링 하며 발생 가능한 리스크를 사전에 식별하여 대응할 수도 있다.
수평적인 업무 협력자로서 지속, 반복되는 업무의 루틴을 각자의 재량으로 확실하게 책임지는 것이 조직의 목표 달성에 가장 큰 효능이 있을 뿐 아니라 각자 역량 개발에도 효과적임을 리더와 구성원 모두가 주지할 필요가 있다.
비단, 고참급 관리자들에게만 고독한 당신이 보이는 건 아니다.
젊은 리더들에게도 종종 이런 모습을 보곤 한다.
이 글을 통해서는 솔선수범이라는 허울로 고독한 헌신과 희생을 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지만, 실상 고독한 헌신과 희생이 아니라 뜻을 모아 함께 달려가는 조직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리더의 솔선수범 뿐 아니라, 그를 생각하면 연상되는 긍정적인 리더십, 리더상을 만들어 가는 것도 필요하다.
조직에서 인정을 받는 리더.
지식과 지혜가 충만한 리더.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리더.
변화와 혁신을 주도하는 리더.
구성원의 성장을 이끄는 리더.
상호 신뢰와 존중을 바탕으로 소통하는 리더.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제공하는 리더.
마지막으로 조직 구성원 전체에게 함께하면 '함께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되는 리더'
생각컨데, 마지막에 제시한 '함께 성장하는 리더'야 말로 리더십의 끝장판이 아닐까 생각한다. 함께 성장하는 리더십을 위해서는 앞선 리더십의 역량이 골고루 필요하기 때문이다.
고독한 리더가 되지 말자.
우리는 '함께 성장하는 리더'가 되어야 하며 만약 어느 곳, 어느 순간에 그리하지 못했을 지라도 그 가치관과 이상은 변하지 말자.
우리는 모두 구성원과 함께 성장하는 리더가 되자!
- 까칠한 펜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