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6. [베트남] War Remnants Museum
베트남 전쟁. 우리도 당시 수많은 병력을 보냈던 전쟁이고, 가해자 입장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회고와 반성이 필요한 역사적 사건이다. 한국전쟁(6.25)과 같이 보통 전쟁이 일어난 장소를 전쟁의 명칭으로 사용하다 보니 전 세계적으로 '베트남 전쟁(Vietnam War)'이란 용어가 보편적이지만, 베트남에서는 항미 전쟁(Kháng chiến chống Mỹ)이라 부른다. 영어로는 Resistance War Against America이며, 교과서와 박물관에서 칭하는 공식적인 명칭이다. 전쟁의 명분조차 미국이 조작해서 만든 최악의 부도덕한 전쟁이었으니 베트남 입장에서는 베트남 전쟁이라 부를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이번 글의 주제인 호찌민전쟁박물관(War Remnants Museum)도 설립 초기에는 미국이 일으킨 전쟁범죄임을 명확히 하기 위해 '미국전쟁범죄박물관(Museum of American War Crimes)'이라 명명했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 외교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현재 명칭으로 변경하였다. 우리는 항상 미국의 관점에서 또는 최소한 중립적 관점에서 베트남 전쟁의 역사를 배워왔으니, 침략을 당한 현지에서는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궁금해 방문하였다.
✔️ 호찌민전쟁박물관을 계기로 미국이 베트남의 정치부터 전쟁까지 어떻게 개입하고 침략했는지 되돌아보다.
✔️ 명칭: War Remnants Museum (베트남어: Bảo tàng Chứng tích Chiến tranh)
✔️ 홈페이지: https://baotangchungtichchientranh.vn/vi
✔️ 주소: https://maps.app.goo.gl/yNPWPHVpxi5xAQxV9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자 프랑스는 인도차이나(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식민지를 일본으로부터 되찾기 위해 1945년 말부터 군대를 보내기 시작했다. 호찌민이 베트남민주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한 지 불과 며칠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재식민지를 목표로 했던 만큼 프랑스는 호찌민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1946년 11월 하이퐁 공격을 시작으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프랑스의 움직임에 공식적으로는 반대하였으나, 동유럽의 공산화, 중국의 공산화, 6.25 전쟁 등 냉전시대가 본격화되자 동남아시아의 공산화 저지를 위해 프랑스에 전비는 물론 무기 대부분을 지원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프랑스는 1954년 디엔비엔푸(Điện Biên Phủ)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결국 인도차이나에서 철수하고 만다. 더 이상 미국은 인도차이나에서 공산화를 저지할 대리자로 프랑스를 이용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1954년 4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종전을 선언하는 제네바 협정(Geneva Accords)에서는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프랑스의 남베트남과 베트남 독립동맹회(베트민; Việt Minh)의 북베트남으로 임시 분단하고, 1956년에 총선거를 실시해 통일하는 것으로 합의하였다. 하지만 미국은 호찌민의 공산주의 정권으로 통일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총선거 실시를 지지하지 않았고, 남베트남에서 미국 중심의 반공 정권을 세우기로 결정한다.
당시 바오다이(Bảo Đại) 황제가 통치하던 베트남국은 쿠데타에 이어 1955년 10월 국민투표로 무너지고, 응오딘지엠(Ngô Đình Diệm)을 초대 대통령으로 한 베트남공화국이 건국되었다. 미국은 이 베트남공화국에 군사적 지원은 물론, 국가 재정의 절반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의 원조금까지 지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정권은 원조금을 경제 개발에 사용하지 않고 사치품을 사들였고, 국가권력은 대통령 가족이 독식하는 등 심각하게 부패하기 시작했다. 시민단체의 반부패운동을 시작으로 좌익∙우익 간의 반목과 테러가 반복되며 치안은 악화되는 등 국가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한참 혼란스럽던 이 시기 1960년에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소위 베트콩(Vietnamese Communists)이 결성되었다. 베트콩은 베트남 공산주의자의 약칭이고, 공식적인 명칭은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다.
응오딘지엠 정권의 부패와 무능을 확인한 미국은 베트남에 본격 개입하기로 결정한다. 1963년 CIA는 거금을 들여 남베트남 장군들에게 쿠데타를 사주하였고, 응오딘지엠은 별 저항도 못하고 쿠데타군에게 살해당한다. 하지만 구심점이 사라지면서 남베트남은 더욱더 혼란에 빠져들었다. 이를 계기로 베트콩은 농민들의 마음을 얻어 농촌에서 세력을 대폭 확대하였고, 남베트남 정예병력들조차 베트콩에게 패배하기 일쑤였다. 이 시기부터 미국은 남베트남을 도와 게릴라 침투 공작을 벌이며 국지적인 교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전쟁 선언을 공식적으로 하지 않았을 뿐, 이미 실질적으로 전투에 참여했던 것은 물론, 남베트남 내부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은 이미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응오딘지엠 정권은 특히 불교를 탄압했다. 본인이 가톨릭이었기 때문이었을까, 국교나 다름없는 불교를 공공연히 탄압했고, 일부 지역에서는 강제로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는 일까지 벌여 여론은 완전히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에 대한 격렬한 반정부시위까지 더해지던 와중에 승려 틱꽝득(Thích Quảng Đức)의 소신공양(燒身供養) 사건이 벌어진다. 1963년 6월 불교 승려들의 침묵 가두시위가 있었던 사이공에서 가부좌를 틀고 주변 승려들의 도움을 받아 휘발유를 몸에 붓고 소신공양을 감행한 것이다.
내가 눈을 감아 부처님의 곁으로 가기 전에, 조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국민들에게 박애와 자비를 베풀고 종교 평등 정책을 실행하기를 응오딘지엠 대통령께 정중히 간청드립니다. 모든 덕 높으신 비구, 비구니, 부처님의 자손들이여, 그대들이 결속하고 희생하여 불교를 지키기를 간곡히 호소합니다. 나무아미타불.
틱꽝득 스님의 유언
이 소신공양이 미국 언론에 보도되면서 응오딘지엠 정권에 대한 미국의 불신은 극에 달하게 된다. 게다가 응오딘지엠 동생의 부인이자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던 쩐레쑤언의 망언이 방송을 통해 여과 없이 전달되어 미국은 응오딘지엠을 제거할 결심을 굳히게 된다. 당시 케네디 대통령은 사실상 쿠데타를 지원해 응오딘지엠을 제거에 동의하였다.
불교 지도자들이 한 게 뭐가 있습니까? 기껏해야 중 놈 하나가 바비큐가 된 것뿐인데 말입니다.
중놈들이 그렇게 불쇼가 하고 싶으면, 미국제 가솔린 말고 나한테 오면 내가 가솔린 공급해 주겠다.
중놈들이 활활 불타오르게 놔두고 우리는 그 불쇼를 보면서 박수나 쳐 주면 된다.
쩐레쑤언의 인터뷰 발언 (YouTube 영상 링크)
프랑스도, 응오딘지엠 정권도, 쿠데타 정권도 그 누구도 공산주의 확산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자 미국은 본격적으로 직접 개입할 계획을 세운다. 본격 참전할 명분이 필요하던 찰나, 1964년 8월 초 통킹만 사건(Gulf of Tonkin Incident)이 벌어졌고, 이를 계기로 미국은 전쟁을 본격화했다.
1964년 8월 2일 미 해군의 매독스함은 북베트남 연안의 통킹만에서 신호정보 수집을 목적으로 항해 중이었다. 적의 본거지 앞에서 항해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상 공격을 해달라는 도발적인 의도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이다. 이에 통킹만에서 북베트남 해군 어뢰정과 접촉해 짧은 교전이 발생했다. 북베트남 해군은 사망자 4명 등의 피해를 입은 반면, 미 해군은 피탄 자국 정도의 경미한 피해에 불과했고 단 한 명의 부상자도 전사자도 발생하지 않았다. 뒤이어 8월 4일 미 해군 구축함은 북베트남 어뢰정으로부터 다시 공격을 받았다. 공격을 받았으니 되갚아주는 것은 명분이 분명했다. 사건 직후 린든 존슨 대통령은 TV 연설을 통해 북베트남이 미국을 공격했음을 국민들에게 공표하였고, 그렇게 3일 만에 미 의회는 베트남에서 필요한 모든 군사행동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즉 베트남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침략의 명분을 만들어준 통킹만 사건은 미국의 조작임이 밝혀졌다. 8월 2일의 1차 교전은 사실이었지만 피해가 거의 없었고, 8월 4일의 2차 교전은 존재 자체가 없었다. 공격은커녕, 근해에 북베트남 해군 함정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미국 국방부 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의 책임 아래 작성된 펜타곤 보고서(The Pentagon Paper)가 1971년 유출되면서 미국이 전쟁 개입을 목적으로 조작했다는 사실이 폭로된 것이다. 펜타곤 보고서는 1945년부터 1968년까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미국이 수행한 역할을 기록한 보고서를 말하는 것으로, 공식 명칭은 <United States–Vietnam Relations, 1945–1967>이다. 당시 연방정부는 미국의 안보 이익에 반한다는 이유로 관련한 언론 보도를 금지하고자 하였으나, 미국 연방대법원은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가 기사를 게재할 수 있음을 허락하였고, 이 조작사건은 밝혀질 수 있었다.
박물관은 베트남 전쟁을 제2차 세계대전과 6.25 전쟁과 함께 비교해 설명한다. 제2차 세계대전에 비해 훨씬 오랫동안 이어졌던 점을 감안하더라도 베트남 전쟁의 규모는 엄청났다. 참전 군인만 총 874만 명에 달했고, 1969년 4월에는 무려 55만 명이 전쟁에 동원되었다. 무려 5만 8천여 명이 사망하였고, 30만 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전사자 수가 한국전쟁의 약 3배에 가까웠고, 제2차 세계대전의 거의 절반에 다다를 정도로 피해가 엄청났다. 무엇보다도 투하된 폭탄의 규모가 놀라웠다. 제2차 세계대전이 5백만 톤 규모인 반면, 베트남 전쟁은 그 3배에 가까운 1,430만 톤 규모였다. 그로 인해 전쟁 지출비용 또한 제2차 세계대전의 2배가 가까운 6,760억 달러가 투입되었다. 가장 심각한 참상이었다고 알려졌던 제2차 세계대전과 우리에게 익숙한 6.25 전쟁과 비교하니, 베트남 전쟁의 규모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베트남 전쟁에 참여한 상대 국가들의 참전 규모도 박물관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베트남 전쟁은 북베트남(베트남민주공화국)과 여러 참전국과의 전쟁으로 가장 큰 참전은 남베트남 정부군이었다. 1964년부터 무려 50만 명이 넘게 참전해 1971년부터는 무려 100만 명 이상이 참전하였다. 단순히 베트남과 미국의 전쟁이 아닌 북베트남 vs. 남베트남 정부군, 미국과 동맹국(대한민국, 태국, 호주, 필리핀, 뉴질랜드 등)의 전쟁인 것이다. 그래서 박물관은 남베트남 정권을 puppet(괴뢰)라 표현한다. 당시 북베트남 시각에서 남베트남은 주권도 없고 미국의 꼭두각시에 불과한 반공국가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박물관의 이름이 '호찌민' 전쟁박물관이라는 사실이 다시금 떠올랐다.
동맹국 중에서는 한국의 병력 규모가 가장 컸다. 1964년 200명을 시작으로, 1968년에는 최대 5만 명의 병력이 있었고, 1972년까지도 3만 6천 명을 넘게 유지해 오히려 미국보다 많은 숫자를 유지했다. 미국의 지원이 절실했던 우리의 입장을 백번 이해하더라도, 동맹국 중 가장 큰 규모의 파병을 하면서 베트남 국토를 파괴하고 민간인까지 학살했던 죄에서 우리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박물관에서 뜬금없이 한글이 적힌 우리나라 사진을 발견했다. 공인중개사 사무소를 배경으로 중년 남성 2명을 찍은 사진이었다. 베트남 전쟁과 무슨 관련일지 궁금했다. 사진만으로는 알 수 없었지만, 사진 아래 설명은 다음과 같았다.
한 건물 앞에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여 고엽제에 노출된 전우 연락 사무소"라는 문구가 붙어 있다. 이 사무소의 주인은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이다. (경기도 안양시, 대한민국, 1983)
참전 군인이 복귀 후 공인중개사 사무소를 운영하고 있었고, 그는 고엽제(Agent Orange) 피해를 본 전우들이 연락할 수 있는 소통창구 역할을 했던 것이다. 박물관이 이 사진을 전시했던 이유를 생각해 보면, 전쟁의 피해는 가해자인 참전국 군인까지 미치고, 그것은 국경도 넘어선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싶다. 또한 전쟁이 끝나도 그 후유증은 오랫동안 지속된다는 점도 보여주는 듯하다.
미국이 쏟아부은 고엽제는 여전히 우리 국민에게 남아 있다. 국가보훈부의 2025년 10월 통계 기준으로 여전히 약 15만 명에 이르는 피해자가 있다. 이 피해도 철저히 기억해야 하지만, 부도덕한 전쟁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가해자로서의 정체성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역사이다.
Epilogue
박물관에서 가장 많이 보였던 사람들은 서양인들이었다. 한국인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고, 베트남 현지인들도 서양인들보다는 적어 보였다. 서양인들 모두가 미국인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그들이 부도덕했던 전쟁범죄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우리도 베트남전에 사실상 자발적으로 참전했다는 점, 민간인에게도 큰 피해를 입혔다는 점이 사회적으로도 잘 공론화되지 않았고, 학교에서도 잘 가르치지 않는다는 점이 못내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