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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앨리스 Mar 29. 2024

여기 아닌 어딘가에

반드시 있을 행복을 찾아서

제주 협재 해수욕장, 2017 / iPhone 8+

  나는 회피형 인간임을 먼저 고백한다. 힘든 일이 닥쳐올 때마다 토끼굴로 꽁꽁 숨어서는, 심연의 바닥을 찍고 나서야 겨우 숨구멍을 찾아 빼꼼히 고개를 내민다.

기획자로 일을 할 때는 그 정도가 심각해서 3개월에 한 번씩 제주도로 도피 여행을 떠났다. 드넓은 자연 속을 누비며 자유를 만끽하고 돌아오면 사무실은 더더욱 감옥같이 느껴졌다. 그러면 나는 또 3개월 뒤 출발하는 제주도행 티켓을 구매해 놓고, 떠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하루하루를 버텨내곤 했다.


  이 사진을 찍게 된 날도 그랬다. 무거운 마음은 서울에 잠시 내려두고, 오래된 필름 카메라 하나만 달랑 들고 떠난 여행이었다. 제주에서 가장 좋아하는 동쪽의 구좌읍을 거쳐, 숙소가 있는 서쪽의 한림읍을 향해 달리던 자동차의 사이드미러 위로 환상적인 빛 내림이 펼쳐지고 있었다. 슬슬 노을이 지는 시간이었고, 30여분의 매직 아워를 놓칠세라 마음이 조급해진 나는 협재 해수욕장으로 목적지를 변경했다.

  구름이 높고 날씨가 맑았던 터라 노을이 예쁠 것이라는 예상은 했지만, 시시각각 변화무쌍한 제주의 날씨에 그 예상이 들어맞는 경우는 드물었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아서였을까. 서둘러 달려간 협재의 풍경은 뜻밖의 선물과도 같았다. 구름을 뚫고 내리던 빛줄기는 신성하고도 숙연한 느낌이어서, 그 광경을 렌즈로 얼른 잡아놓고는 해가 다 넘어갈 때까지 꼼짝 않고 서서 눈에 담았다.


  그날의 나는, 아마도 현재에 존재하는 행복은 바라보려고도 하지 않은 채 손에 잡히지 않을 신기루를 쫓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반드시 행복해야만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불행한 사람으로 치부했는지도 모른다. 모든 껍데기가 벗겨지고 나서야 마주한 본질을 통해 배울 수 있었던 것은, 행복은 결국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지금의 나는 육아로 인해 자유롭게 훌쩍 떠나는 여행은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더 이상 불행하지 않다. 서울임에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작은 사람의 손을 잡고 집 바로 뒤에 있는 숲을 산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계절마다 동네에는 다양한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고, 집 안에서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을 수 있어 여행을 가지 않아도 매일이 여행하는 기분이다. 물을 가득 머금은 식물들 위로 내리쬐는 아침의 햇살, 불어오는 바람에 살랑이는 커튼에서도 나는 행복을 느낀다. 스쳐가는 찰나의 순간, 어딘가가 아닌 바로 여기. 너무나 작고 사소해서 소중한지도 몰랐던 것들이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행복'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고 제주를 떠돌던 시간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 덕분에 지금의 평온도 얻은 것일 테니. 다만 아주 가끔은 이 행복이 사라질까 봐 두려운 것도 사실이다. 때때로 올라오는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해 나는 더욱 현재에 집중하기로 했다. 일어나지 않을 미래의 일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고, 어쩌면 행복했는지도 모를 과거에 희망을 두지 않고. 쌔근쌔근 잠이 든 작은 사람의 숨소리로 하루의 끝을 닫을 수 있는 것에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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