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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베카 Mar 05. 2024

작은 악의로 찢어진 캔버스

무거운 책임






 그 시절 내가 살던 아파트단지는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계단을 올라가면 한 층에 두 집씩 있는 구조인데 1층은 각 호수마다 전용문이 있어, 계단은 지상에서 2층까지 이어져서 시작되었다. 아파트 전면에 1층높이의 계단이 툭 튀어나온 형태로 생각하면 된다.

 층간소음으로 인한 갈등이나 대면대면한 이웃관계는 큰 이슈가 되지 않았던 시절이다. 지금보다는 더 이웃 간의 정이 있고 시끄러운 아이들 놀이소리도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넘어가주는 어른들이 있었다.

 우리 다섯 친구가 저학년때 하던 놀이 중에 하나는 계단참에서 하는 소꿉놀이였다. 그 좁은 공간에서 소박한 살림살이를 꺼내놓고 까르르 웃으며 소꿉놀이를 했었다. 우리가 시끄럽다며 나와서 호통치는 어른도 없었고, 어쩌다 계단을 내려오시는 아주머니는 그런 우리들을 보고 말없이 웃으며 지나치셨다. 날씨에 상관없이 놀 수 있는 우리의 놀이터 중 하나였다. 지금 같은 때에 계단 참에서 까르르 웃으며 소꿉놀이를 한다면 5분도 안 돼서 호통소리가 들려오고 그 놀이는 파 할 것이다. 애초에 집에서 ‘살금살금 걸어라’, ‘조용히 해라’라고 어렸을 때부터 교육을 받는 아이들은 생각자체가 어려울지 모른다.


 다른 놀이로는 검은색 두꺼운 고무줄을 여러 개 이어 하는 고무줄놀이가 있었다. 사람수가 셋을 넘어가면 두 친구의 발목에 고무줄 양끝을 걸어 놀이가 시작되고, 사람수가 셋이 되지 못하면 전봇대나 나무기둥, 가로등 등등 되는대로 묶고 시작했다. 여러 가지 고무줄놀이노래가 있었고-대표적인 노래로는 ’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로 시작하는 노래-그에 못지않은 현란한 기술들이 있었다. 내 키보다 높은 고무줄을 한 발로 걸어내려 무릎밑에 걸고는 두 발로 재간을 부린다. 노래에 따라 고무줄을 밟았다가 땅을 밟았다가 하며 리듬을 타는 기술도 있었다. 낮부터 밤늦도록 친구들과 회색벽돌로 마감된 단지바닥을 콩콩콩 뛰어댔다. 짓궂은 남자아이가 줄을 자르고 도망가다 우리에게 잡혀서 혼이 나기도 하고 끊어지면 또 이어 묶고 끊어지면 또 이어 묶고 해서, 지금처럼 쉽게 아이들의 흥미를 잃고 잊히는 장난감이 아닌 오랜 시간의 손때가 묻은 애착 어린 놀잇감이었다.


 세 남매 중에 솜씨 좋은 둘째인 주란이네에 따라가 직접 반죽을 해서 도넛을 만들어 먹기도 하고, 집에 있는 전집을 펼쳐서 동생과 끝과 끝을 이어 책 미로를 만들거나 작은 집을 만들어, 책으로 만든 작은 세상에서 매일 새로운 놀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어느 날 신랑이랑 고무줄비행기와 방패연 만들기 얘기를 하다가, 집에서 인터넷으로 드론자격증을 따서 드론을 날리는 아들이야기로 이어졌다. 변한 세월을 느끼기에 충분한 비유였다. 그리고 더욱 그리운 ‘놀이의 추억‘에 빠져들었다.




 하루 중 엄마는 보통 이른 아침에 나가서 밤늦게나 들어오시기 때문에 하루종일 동생은 나의 책임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네가 장녀니까 우리 집 가장이나 마찬가지다’란 말을 엄마에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당시 정확한 뜻은 이해할 수 없었으나 엄마의 말에 따르면, 공부도 잘해야 했고 행동도 바르게 하며 엄마의 모든 말에 ‘순종‘하고 어린 동생을 ‘엄마처럼’ 챙기는 것을 말했다. 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책임의 문제였다.


 그 당시 일기장을 읽어보면 온통 어린 동생이 귀엽다는 이야기뿐이다. 그런 동생이 하루는 친구와 논 이야기를 하는데 이상했다. 친구네 집에 놀러 갔는데 아줌마들과 아저씨들이 많고, 커피와 술을 판다는 거다. 그래서 친구랑 제일 안쪽 구석의 살림방에서 비디오를 보면서 놀았다는 이야기였다.

 일단 설명하는 동생친구네 집이 내 친구들 집과 사뭇 달랐고, 아저씨들과 아줌마들, 술과 커피는 쉽게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무래도 이상해서 친구들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더니 친구들의 의견은 그 집이 이상한 가게 같고 내 동생이 나쁜 친구를 사귀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동생에게 그 친구와 놀지 말라고 말해보라길래 이내 공감하며 동생에게 말을 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동생의 반응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격렬한 거부였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친구들과 함께 그 친구에게 가서 내 동생과 놀지 말아 달라고 했다. 거친 행동이나 말은 없었으니 이야기는 잘 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나만의 순진한 착각이었다. 그다음부터 내가 밖에서 놀고 있으면 나에게로 돌이 날아왔다. 몇 번이나 계속되니 친구들과 범인을 잡겠다고 나섰는데 며칠을 술래잡기하다가 잡은 범인은 그 동생친구였다. 설마 했는데 눈앞의 아이를 보니, 며칠간 겪은 공포의 감정이 스쳐 지나가며 순간 어이가 없어 온몸이 굳어버렸다. 친구와 놀지 말라고 한 친구언니의 부탁에 마음이 상했을 수 있다. 하지만 사람에게 돌을 던지다니! 이번에는 곱게 이야기가 안 나갔다. 몰래 내 동생과 노는 것도 그만하라는 어설픈 엄포와 함께.


 그 당시 엄마는 무슨 얘길 해도 눈을 마주치거나 귀담아듣는 일이 없었다. 심지어 크리스마스날 산타할아버지 이야기를 동생과 신이 나서 하는데, ‘산타는 없으니 선물도 없다’고 하셨다. 변비로 고생할 때도 ‘시끄럽다’가 다였고, 아토피로 고생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를 곱게 보지 않는 집주인아주머니가 ‘너네가 하는 말은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안 믿어!’라며 알 수 없는 분풀이를 하는데도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 동생 친구문제까지 얘기할 ‘이유’가 없었다. 내가 돌에 맞은 얘기도 할 ‘필요’가 없었고. 스스로 해결하면 되는 일이었다. 내가 느낀 ‘감정’까지도 말이다.






#어디까지가언니의책임일까

#매번강조하던순종이란

#얼토당토않은#가장의책임이란

#대체언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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