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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지현 Sep 06. 2023

퇴사 통보 전날의 심경

11화. 서른, 은퇴를 결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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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드디어 그동안 참아왔던 퇴사 통보를 하는 날이다. 잡다한 걱정과 우려로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퇴사에 대한 확신은 들었지만 어떤 말로 전달해야 할까?

사람들의 만류와 회유에 흔들려 넘어가진 않을까?

혹여나 보복성 업무 지시로 괴롭히진 않을까?


그래도 앞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거쳐야만 하는 과정이다. 미뤄봤자 아까운 시간만 날리는 꼴이니 하루라도 빨리 통보하는 게 이득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버텨야 했고, 버틸 수 있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첫째,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평생동안 하자니 엄두가 안 난다.

둘째, 팀장님의 모습은 내가 바라는 미래가 아니다.

셋째, 하고 싶은 일과 앞으로의 방향성을 정했다.

넷째, 배우자와 아이가 없으니, 결정권은 오롯이 나에게 있다.

다섯째, 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 필요한 만큼의 돈을 모았다.

여섯째,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건강 회복이 급선무다.


생각이 여기까지 다다르자 회사와 나, 모두를 위해 떠나야 했다. 그러는 편이 서로에게 이로울 것이다. 시간을 돈과 맞바꾸는 거래가 더 이상 공정하게 성립되지 않았다. 회사 입장에서 나는 비용이고, 내 입장에서 회사는 시간을 먹어치우는 하마였기 때문이다.


퇴사 사유는 간단하게 두 가지이다.


첫째, 건강상의 이유.

둘째, 완전히 새로운 일에 도전, 그리고 창업.


과장도 축소도 없이 있는 그대로 말할 것이다. 거짓말을 하는 순간 스텝이 엉켜버려 나의 숭고한 뜻이 제대로 가닿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만일 달콤한 제안으로 나를 흔들면 어쩌나? 이직처럼 거처와 일자가 딱 정해지지 않았으니까. 몇 개월 휴직 시켜줄 테니 푹 쉬고 오라던지, 원하는 직무로 전환해 주겠다고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퇴사를 감정적인 이유로 결정한 것이 아니다. 지난 5년간 치열하게 고민했다. '조금만 참으면 상황이 점점 나아지겠지.', '주말이나 연휴에 쉬면 몸이 회복되겠지.'라며 스스로 다독이며 애써왔다. 인생이 그렇듯 악재는 주기적으로 반복되었고, 일이 벅차고 힘에 부친다는 생각만 더욱 강해졌다. 휴식기를 갖고 돌아온들 이러한 상황이 멈춘다는 보장이 없으니, 결국 같은 결정을 내리게 되리리라.


다른 직무로 배치되더라도 분야를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수질에서 대기로, 또는 화학물질에서 폐기물로 가는 식. 이전 회사에서 모든 환경 일을 접해보았지만 단어만 조금 달라질 뿐 업무 성격은 같았다. 성취감이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었다. 만약 전혀 다른 마케팅이나 기획 쪽으로 직무전환을 해도 회사가 속한 산업군 자체에 애착이 없었다. 스마트폰 디자인은 흥미롭지만 배터리를 구성하는 중금속은 어쩐지 모호하다. 나는 직접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는 일에 재미와 성취감이 드는 사람임을 깨달았다. 내가 하는 일이 무형의 회사가 아닌 내 가족, 친구, 지인에게 이로운 영향력을 미친다고 느낄 때 행복해진다. 함께 잘 살고 싶다.


부서 이동이 완벽한 해결책이 되어주진 못 할 것이다. 회사원이라는 틀을 벗어나지 않고서는 고민의 굴레가 반복되리라 생각한다. 다른 부서에는 어떤 사람이 모여있을지, 업무강도는 어떨지, 어떻게 하면 인정받을 수 있을지, 끝없는 고민이 이어질지도 모른다.


퇴사 이후의 삶은 어떻게 꾸려나갈까? 우선 건강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규칙적인 수면과 조미료 없는 식사, 힘닿는 만큼만 걷기. 허리 통증과 방광염이 잦아들면 필라테스 학원에 등록할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휴식기를 아깝게 흘려보낸 시간이라고 여기지 않는 마음가짐이다. 죄책감이 들지 않도록 아침마다 일기를 써두면 좋겠다. 남겨둔 기록이 어떤 유의미한 콘텐츠로 탄생할지 모를 일이다. 상태가 호전되면 여행을 떠나 마음을 재정비하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퇴사 전 1~2달 동안 번 돈을 외국 한 달 살기에 아낌없이 쓸 예정이다. 떠날 날과 돌아올 날을 정해놓지 않아도 된다. 연차를 쓰기 위해 상사의 안색을 살피느라 눈치 보지 않아도 된다. 일을 앞당겨 끝내고 가느라 무리하게 야근하지 않아도 된다. 메일이 몇 백 통 쌓였을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숨통이 트인다.


벌이고 싶은 일도 무궁무진하다. 다만 힘들면 즉시 중단하고 다시 시작하기로 나와 약속한다.


사업과 관련하여 SNS 등 온라인 플랫폼 성장시키기, 펀딩, 지원사업 참가, 책 출간, 강의, 스마트 스토어 등 죄다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다. 포토샵과 영상 편집, 유화 등도 배우고 싶다.


이 일만 해도 남은 생이 부족하다는 생각이다. 빨리 시작해서 새로운 커리어를 쌓아나가야 한다. 젊을수록 실패의 충격에도 회복 탄력성이 크지 않은가.


롤모델의 존재가 때론 비빌 언덕이 되어준다. 김소영 아나운서는 방송국을 나갈 때 더 이상은 못 버티겠다며 차 안에서 펑펑 울었다고 한다. 퇴사 통보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결국 해낸 용기를 떠올려보면 나도 할 수 있고, 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주먹이 불끈 쥐어진다. 그녀는 퇴사 후 일본 책방 여행을 떠났고, 여행 에세이를 출간한 뒤, 동네책방으로 창업을 시작해 현재 수많은 직원을 거느린 사업가로 멋진 삶을 꾸려가고 있다. 나름의 고충이 있겠지만 어쩐지 밝은 표정인 그녀를 보며 마음을 다잡는다.


엄마, 아빠, 언니, 동생, 친구들. 내 편이 이렇게나 많은데 겁낼 필요 없다. 그들에게 받은 은혜를 되갚기 위해서라도 여생을 열심히, 행복하게 살아가야 한다.


마음 맞는 후배가 눈에 많이 밟힌다. 결정을 물릴 정도로. 그러나 이곳에서의 인연은 다했을지라도 끝은 아닐 것이다. 플랫폼 사업을 꿈꾸는 나와 코딩을 배울 거라는 후배가 다시 뭉치게 될지도 모른다. 이곳에서는 생산성이 떨어진 내가 빠지면 오히려 팀이 힘차게 굴러갈지도 모른다. 똑똑하게 곧잘 해내는 후배의 모습을 여럿 보았으니 큰 무리 없이 이어갈 수 있을 테다.


따로 찾아뵈어 인사드리고 싶은 분이 미미하게나마 있다. 우리는 평생에 몇 번이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을까? 하나하나 신경 쓰다 보면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나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죽겠다고 아우성치는 나를 더 이상 외면하면 안 된다. 말이 안 된다. 미워할 사람은 미워하고, 축복을 빌어줄 사람은 손뼉 쳐줄 테니까. 있는 그대로 차분히 의사를 전달하면 누구든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내일, 숨지 말고 정면돌파 해보자.


인수인계를 위한 한 달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쏜살같이 지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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