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메이크업
세계적으로 유세를 떨치고 있는 코로나19 덕분에 사람들의 일상은 이전과는 크게 달라졌다. 화상 미팅과 재택근무가 늘어났고 과거에나 있었을법한 통금이 생겼으며 해외여행은 꿈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코로나로 인해 겪게 된 대부분의 변화는 자의가 아닌 타의로 이루어졌다. 그렇기에 나는 주어진 변화에 그저 적응할 뿐이었다.
노메이크업이라는 신세계를 만난 건 19년도 연말쯤이었다. 개방적이고 주체적인 생각으로 멋있게 인생을 즐기던 친구와 오랜만에 만났다. 일 년 만에 본 친구는 민낯이었다. 19년도까지만 해도 나는 화장은 안 하고 밖에, 회사에 가는 건 상상도 못 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여행 가서 화장품이 든 파우치를 놓고 온 것을 깨닫고 부랴부랴 근처 화장품들을 사기도 했고 늦잠 잔 날은 지하철에 앉아 빠르게 화장을 하곤 했으니 말이다. 화장을 진하게 하진 않아도 화장을 하지 않은 내 민낯의 노르스름함을 남들에게 보여줄 수 없었다. 뭔가 민낯을 보여준다는 건 내 속살을 노출하는 기분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화장하는 것을 즐기는 타입도 아니었다. 화장은 내게 즐거운 일이 아닌 외출하기 전에 꼭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친구의 민낯은 내가 놀라움이었다. (그때는 왜 그런 생각에 꽉 사로잡혀있었는지는 몰라도 말이다.)
"너 화장 안 했어?"
"응 나 요새 화장 안 하고 다녀! 노메이크업 운동이라고~"
"오잉? 화장을 안 한다고??"
"응 화장 안 하니깐 진짜 좋아. 화장을 안 하면 내 본연의 피부에 더 집중하게 되거든. 최근에 노메이크업으로 다니면서 내가 살짝 홍조가 있는 피부라는 걸 깨닫게 됐어! 그래서 기존에 색조화장품에 쓰던 돈도 다 기초화장품이나 선크림에 투자하고 내 피부 자체를 건강하게 만드려고 해."
"아... (갸우뚱) 그런데 너 지금 남자친구 없지?"
"푸핫!! 지금 남친 없긴 한데 ㅋㅋㅋㅋ진짜 좋아. 노메이크업! 해봐"
"아.. 나는 화장 지우면 피부가 노래.."
"아니 나는 더 까매서 화장 지우면 완전 콩이야! 그래도 쌩얼도 다니잖아~하물며 너는 피부가 좋아서 화장 안 해도 이뻐! 자신감을 가져!"
친구의 노메이크업을 보면서도 나는 친구가 연인이 없어서, 예쁘게 보이고 싶은 이유가 없어서 그럴 수 있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28살의 나 또한 얼마나 구시대적 생각을 가지고 있었나 싶다.
그때 처음 본 친구의 노메이크업이 낯설게 느껴지면서 일리가 있었다. 화장을 하지 않으면 화장을 하지 않는 본연의 피부에 더 집중하게 된다는 말. 내 원래 피부를 감추거나 꾸며내려 하지 않고 더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는 말 말이다. 그런 친구의 자신감 넘치는 말과 행동에 설득되어 바로 그다음부터 나도 노메이크업으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19년도 12월은 코로나가 발병된 지 2개월 차로 영문모를 전염병이 막 퍼지기 시작하던 때라 마스크 대란이 났던 때이기도 했다. 익숙하지 않은 (아직까지도 익숙하지 않지만;) 마스크를 쓰는 것도 불편했지만 매번 화장을 해도 마스크에 묻어 나오고 화장이 지워지거나 마스크에 가려지니 화장의 의미도 없다고 느낄 때였다. 그래서 나는 용기 내어 노메이크업으로 마스크를 쓰고 출근했다.
그리고 주변 동료분들에게 이 노메이크업이 얼마나 삶을 편하게 만들어주는지 예찬했다. 간단하게 팩트와 눈썹 정도만 그리는 나도 이렇게 노메이크업이 편한데 그보다도 더 무겁게 화장을 하면 얼마나 더 편하겠나.
"아침에 화장 안 하니깐 너무 편해요! 어차피 마스크 쓰니깐 화장하지 말고 다녀보세요! 신세계예요."
"젊고 피부 좋아서 그렇게 할 수 있지~화장 안 해도 한 거라 차이 없잖아."
"우리가 화장하는 것이 디폴트값이라 노메이크업이 뭔가 어려울 거 같은데 노메이크업 진짜 별거 아니에요~! 어차피 화장하고 다녀도 마스크 쓰고 다니니깐 잘 지워지고 거의 가리고 있잖아요."
그렇게 직장 내 노메이크업 운동가였던 내 말에 다른 동료 한분도 정말 화장을 하지 않고 출근하시기 시작했다. 나 말고 다른 분을 더 편한 새로운 세상으로 인도했다는 점에서 뿌듯함을 느꼈다. 며칠 노메이크업으로 다니시더니 그분 또한 노메이크업에 굉장히 만족하셨다.
반면 노메이크업으로 다니니 그분에게 다른 여자고참이 "화장 좀 하고 다녀라~얼굴이 그게 뭐니?"라고 지적질을 했다. 남이사 화장을 하든 말든 뭔 상관인지는 몰라도 말이다. 이렇게 남의 일에 참견하며 불필요한 핀잔을 주는 할 일 없는 사람은 어딜 가나 있을 거다. "일하는 대부분을 컴퓨터 앞에 있는데 남이사 화장을 하던 말던 뭔 참견이래요? 정말 웃겨요! 그분은 정말 한가한가 보네요." 같은 여자로서 화장을 안 하면 큰일난다고 생각하는 고지식한 자세, 자기 눈에 보이는 것을 배려도 없이 내뱉는 무례함, 남의 화장에 참견하는 오지랖에 화가 났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의 말이 몰상식을 보여준다는 것도 모른 채 용기를 내서 남을 위한 화장을 내려놓은 동료에게 응원은커녕 핀잔을 준 게 말이다. 뭐 그래도 어쨌든 그 뒤로 그분은 계속 화장을 하지 않으셨고 나 또한 지금까지 화장을 하지 않고 다닌다.
그 당시는 가끔 외부 담당자와 미팅을 할 때 쌩얼에 안경 쓰고 미팅을 하고 와서는 너무 못생긴 얼굴로 미팅한 건 아닌가 생각이 들긴 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분들도 수염에 쌩얼에 노메이크업이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이상하게 여자는 예뻐야 해. 여자는 꾸며야 해라는 강박 속에서 남자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 여자에게는 부자연스러운 일이 되곤 한다. 나도 그들도 똑같은 회사에 똑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렇게 지금까지 20개월간 화장을 하지 않는 일이 지속되면서 몇 개 없던 화장품들도 유통기한이 다 와가고 화장을 하지 않고 출근하는 일도 익숙해졌다. 새로운 직장에 가서도 민낯으로 다녔고 간혹 마스크를 벗고 이야기를 해야 할 때도 나는 당당했다. 코로나로 얻은 내 메이크업 자유를 이제는 진정으로 만끽하고 있다.
여자들의 화장을 예의라고 한다. 무슨 예의일까? 남들에게 꾸며진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예의? '당신을 위해 내가 이렇게 꽃단장을 했어요'라는 예의? 이제 그런 고리타분한 예의 말고 나에 대한 예의를 지키자. 내 본연의 피부를 위해 불필요한 화학제품을 줄이는 예의, 내 여유로운 아침시간을 위해 화장은 스킵하는 예의 말이다. 코로나는 내게 남들을 위한 예의 말고 나를 위한 예의와 자유를 얻게 해 주었다.
그렇다고 나는 거창한 사회운동가가 아니다. 대단하게 세상을 바꾸기 위해 무언가 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인플루언서도 아니기에 내가 노메이업을 한다고 다들 주목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내가 세상을 바꿀 수 없더라도 나의 작은 결심의 변화가 나의 세상을 바꾸었음에 만족한다. 이로울 거 하나 없는 혼란한 시국에서도 내가 선택한 변화가 날 자유롭게 만들어줬다는 것에 감사하다.
여러분이 코로나 시국에 자의적으로 선택한 변화는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