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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유 Oct 11. 2023

존재하지 않지만 관찰되는 것

 며칠 전 심리학에 관심이 있는 친구와 대화하다가 사랑과 정신분석의 관계에 대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친구는 좋아하는 사람으로 인해 가슴앓이하는 중이었는데, 그 이야길 듣다 보니 문득 정신분석을 공부하게 된 계기가 떠올랐다. 나에게 정신분석이란, 사랑을 알고 싶은 사람에게 더없이 차가운 진실을 말해주는 도구였다.


 “나는 사랑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연구해 봤지.” 장범준의 ‘노래방에서’의 가사다. 화자는 사랑이 이루어지는 여러 상황의 수를 연구했다고 하는데, 나는 그와 다르게 정신분석을 파고들었다. 사랑이라는 심리적 작용이 무엇인지, 심리적 동인은 무엇이며 그것이 사라지는 까닭은 무엇인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거나 혹 반대도 인위적으로 종결할 방법은 무엇인지…… 따위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노래의 가사처럼, 잘생긴 사람은 사랑을 하고 못생긴 사람은 사랑을 연구한다. 하지만 어차피 (못생겨서) 사랑을 못 한다면 그 시간에 사랑이라도 공부하는 게 낫지 않겠나, 그런 생각으로 프로이트와 라캉과 클라인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대상관계 이론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는 사랑을 잘하고 못하고와 관계없이, 정신분석이 말하는 냉정하고도 차가운 ‘사랑의 논리’에 주목하게 되었다.


 친구에게 물었다. “정신분석이 말하는 사랑의 ‘희망’ 편을 듣고 싶어, 아니면 ‘절망’ 편을 듣고 싶어?” 친구는 절망 편을 골랐다. 역시, 사랑의 열병을 앓는 자들에게는 낭만적인 거짓말보다 소설적인 진실이 더 궁금한 법이던가. 조금 걱정되기도 했지만, 언젠가는 알고 넘어가야 할 ‘사랑의 진실’에 대해 말해주기 시작했다.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사랑의 진실은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이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프로이트에게 사랑이란 유아의 성욕이, 어린 시절의 환상이, 죽음 충동이 재현한 것과 다름없다.  태어났을 당시의 욕구 — 빨기, 물기, 잡기 ― 를 충족하기 위해, 그러나 영원히 충족될 수 없는  ‘충동’에 사로잡히는 것이 사랑이다. 아기 때 맛보았던 그 충만감을 다시 느끼기 위해 아버지와 비슷한 사람, 어머니와 비슷한 사람을 찾아 그때의 일을 반복하는 행위. 마치 시시포스가 영원히 바위를 굴리는 듯한 가련한 반복 운동이, 프로이트가 말하는 사랑이다.


 프로이트가 생물학적이고 기계적인 관점이라면, 라캉의 사랑은 좀 더 철학적이다. 라캉은 사랑이란 “상대방이 줄 수 없는 것을 욕망하는 것”이라고 했다. 상대방에 대해 일방적으로 환상을 품고, 환상 속의 상대방으로부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겠다고 ‘믿는’ 일이다. 그러므로 라캉에게 사랑은 신앙과 다름없다. 물론 이는 환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상대방은 결코 자신이 갖고 있는 걸 줄 수 없다. 처음부터 그 사람에게 내가 원했던 그것은 결여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결국 라캉에 따르면 사랑이란 환상에 기초한 관계이며, 그 환상이 깨지는 순간 사랑도 깨진다. 즉, 내가 원하는 게 사실 상대방에게 없는 것임을 깨닫거나,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될 때, 환상과 사랑은 끝이 난다. 사랑의 모든 과정은 콩깍지로 시작하여 콩깍지로 끝난다는 말이다.


 프로이트든 라캉이든, 정신분석가들은 사랑에 대해 한없이 의심한다. 특히 그들은 ‘전이 현상’을 심도 있게 다루었고 이를 정신분석 치료의 한 축으로 삼았다. 전이 현상은 환자의 과거 사건 혹은 환상이 정신분석가와 환자 사이에 재림하는 현상인데, 신기하게도(혹은 슬프게도) 전이 현상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랑’과 매우 닮았다. 환자는 분석가에게 애절하게 자신의 감정을 호소하고, 또 애정을 달라고 갈구한다. 그러나 분석가는 결코, 절대로 환자의 요구에 넘어가면 안 된다! 이는 전이 현상일 뿐, ‘진정한’ 사랑은 아니기 때문이다. 전이 현상이 끝나면 환자와 분석가의 관계는 다시 예전과 같이 돌아가고, 환자는 과거의 사건 속에서 또는 환상 속에서 탈출하게 된다. 곧, 치료의 종결이다. 


 그러므로 정신분석 과정에서는 이런 질문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인가?’ 전이 현상이 특별히 잘 일어나는 조건이 있다. 분석가와 환자의 관계, 선생과 제자의 관계, 성직자와 신도의 관계 등. 대화를 주고받고, 비밀을 공유하고, 감정과 기억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관계 말이다. 그런데 이는 일반적인 연인의 사랑과도 닮지 않았는가? 우리가 흔히 접하는 언론 기사 속 금단의 사랑(불륜, 미성년자와의 연애, 집착하는 연인 등)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관계가 아닌가? 그러니 정신분석가로서는, ‘사랑’이라는 개념 자체를 의심할 수밖에. 사랑은 오랫동안 충족하지 못한 생물학적 욕구가 고급스럽게 포장된 것이거나, 영원히 만족할 수 없는 환상의 반복이니 말이다. 과연 사랑이 존재할 수 있을까? 분석가에게 사랑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까지 말을 하자 친구는 무언가 깨달은 표정이었다. 자신도 전이 현상에 휩싸인 게 아니었을까 의심하는 표정. 이것이 정신분석의 차갑고도 냉정한 부분이다. 사랑의 낭만성을 모두 제거하고, 조금 더 진리에 가까운 모습으로 사랑을 숙고하게 만든다. 그러자 친구는 이번엔 정신분석이 말하는 사랑의 ‘희망’ 편을 물었다.

 프로이트의 죽음과, 그의 후계자들의 거부로 인해 거의 폐기된 프로이트의 이론 중 하나는 '죽음 충동'이다. 말년의 프로이트는 인간의 즐거움, 기쁨, 행복 같은 감정에 대해서도 의심했다. 그에게 쾌락 원칙이란 '모든 종류의 자극을 피하는 심리'이다. 슬픔이나 아쉬움, 고통같이 일반적으로 불쾌하다 일컬어지는 자극은 물론, 기쁨과 즐거움 같은 쾌감에 가까운 자극 역시 인간은 피하려고 한다는 뜻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배변욕, 수면욕, 성욕은 모두 자극을 피하려는, 해소하려는 심리이다. 


 그런데 삶이란 건 자극의 연속이지 않은가. 오죽하면 불교에서도 ‘백팔번뇌’라는 용어까지 써 가며 삶의 모든 자극을 표현하지 않던가. 바로 이 지점이 죽음 충동이 성립하는 논리이다. 삶에서 모든 자극을 제거하는 것, 그리하여 극한의 '쾌'는 오직 '죽음'만이 가능하다.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사람이 우울증에 걸리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우울증을 경험한 사람은 안다. 밥을 먹지 않고, 집에 돌아와 아무것도 안 한 채 축 늘어져 있다. TV를 보거나 음악도 듣고 싶지 않다. 그저 한없이 누워만 있다가 그대로 죽어버렸으면 싶다 ― 즉, 삶이라는 자극이 너무 심한 사람에게는, 모든 자극의 제거, 곧 죽음 충동이 한없이 밀려오는 것이다.


 이처럼 죽음 충동이란 '나를 잃는 혹은 잊는 경험'을 뜻하기도 한다. 책이나 영화에 몰입할 때, 잠 속에 깊이 빠져들 때, 우리는 일종의 '죽음'을 경험한다. 그리고 또 다른 죽음 체험 중 하나는 바로 성관계이다. 역동적인 긴장의 연속이 마침내 해소될 때, 연인은 잠시 그들 자신을 잃는다. 우리 사회에서 죽음만큼이나 성관계가 금기시되는 이유는, 바로 그 둘이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연인은, 은밀한 밤의 축제 속에서 (항상은 아니지만 자주) 죽음을 경험한다.


 꼭 성관계에서뿐만이 아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죽음은 일상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나의 자아를 희생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집에만 있던 사람이 어느 날 밖을 나다닌다. 주기보다 받기를 좋아하던 사람이 한없이 내준다. 무뚝뚝하던 사람이 어색하게나마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표현한다. 오래 사귄 연인은 서로 닮는다는 말도 있고, 오래 사귀다 헤어진 사람은 헤어진 옛 연인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는 말도 있다. 연인을 사랑할 때 사라지는 나의 ‘개성’은, 사랑과 죽음이 서로 닮은꼴이라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정신분석가에게 사랑이란, 존재할 수 없으나 관찰되는 무언가이다. 정신분석가는 사랑을 한없이 의심하고, 그것의 정체를 끊임없이 관찰한다. 정신분석가에게 많은 경우 사랑이라 부르는 것의 정체는 ‘애착’의 한 형태이기도 하고, ‘트라우마의 재현’이기도 하고, ‘유아 성욕의 발현’이기도 하며, ‘환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중에는 분명히, ‘사랑’이라 부를 만한 것도 있음을……발견하게 된다.

@BingImageCreator #정신분석_카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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