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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유 Oct 11. 2023

고통까지 끌어안는, 사랑

 사랑은 즐겁고, 행복하고, 고귀한 것이지만, 동시에 관계를 학습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학습에는 고통이 따른다. 즉, 사랑은 일정한 고통을 요구한다는 말이다. 


 사랑에서 고통을 피하려는 노력이 (몇 년 전까지는) 가벼운 형태의 연애였다면, 최근에는 '썸'만 타는 행위로 발전했다. 사랑의 형태는 좀 더 가벼워졌을지 모르나, 사랑에서 고통을 제거하려는 노력은 더 치열해졌다고 할 수 있겠다. 원나잇이나 불륜 같은 인류 전통의 노력은 유사 이래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고.


 그러나 본질적으로 사랑은 ‘고통’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Love is Suffering.” 사랑은 오랜 참음, 오랜 고통, 오랜 인내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고통 없이 행복만 존재하는 게 사랑이라는 교훈은 환상이자 거짓말이다. 우리는 어린이 동화를 읽으며 “그리고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가 한낱 닫는 말에 불과하다는 걸 안다. 그런데 왜 사랑에 대해서는 그러지 못하는가? 왜 유독 사랑에 대해서는 항상 행복해야 한다고, 즐거워야 한다고, 고통이 있다면 사랑이 아니라고 부정한단 말인가.


 오히려 사랑이 주는 고통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남자는, 사랑으로부터 ‘지는 법’을 배운다. 이기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는, 이겨야만 보상과 행복이 존재한다는 명제를 꺾는 데부터 진정한 사랑이 시작된다.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는 내가 옳다고 여길지 모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지는 법을 배우게 된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고, 지는 것이 행복한 것이라는 사실을 배운다. 여자는, 사랑으로부터 ‘인정하는 법’을 배운다. 결국 남자 또한 한 인간이기에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부터 진정한 사랑이 시작된다. 어리광을 부리고 무리한 요구를 해도 언제든 받아들일 거라는 ‘오빠’도 사실은 부족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하지만 이 둘은 사실 같은 말이기도 하다. 핵심은, 내가 사랑하는 혹은 사랑 받는 방식이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리고 그러한 일에는 엄청난 고통이 따른다. 가치관을 바꾸는 일만큼 인간에게 고통스러운 일은 없기 때문이다. 


 모든 사랑이 고귀하다는 말에 동의한다. 하지만 모든 사랑이 유익한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랑은 (비록 기간은 길지 몰라도) 마치 충동구매를 하듯 소비적인 사랑이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랑은 (비록 기간은 짧을지 몰라도) 결실을 거두는 사랑이 되기도 한다. 그 차이를 나누는 건 사랑의 고통을 받아들였는지 여부와 그 고통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여부다.


 만약 사랑의 고통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가벼운 연애, 가벼운 썸밖에 되지 못한다. 어떠한 교훈도, 어떠한 결실도, 어떠한 유익도 없다. 사랑의 고통을 받아들였더라도 결국 극복하지 못하면 한때의 즐거웠던 혹은 고통스러웠던 사랑으로만 남게 된다. 다시 만나 재결합하더라도, 그 고통을 극복하지 못해 다시 헤어진다. “한번 헤어진 커플은 같은 이유로 다시 헤어진다”는 말은 그래서 진실이다.


 사랑은 고통스럽다. 책임이 따른다. 사랑을 시작하기 전에는 장밋빛 미래만 꿈꾸지만, 사랑을 시작한 후에는 알게 된다. 나의 짐이 두 배가 된다는 사실을. 그런데도 한번 사랑에 빠진 사람이 계속해서 사랑에 빠지는 까닭은, 그 짐이 결국 나의 육체와 영혼을 더욱 단단히 만든다는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깨닫기 때문일 터.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강하게 만들듯, 사랑의 고통은 우리의 자비와 연민, 온유와 인내 같은 사랑의 열매를 더욱 풍성히 맺게 해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고통을 조금은 기쁘게, 깊이 끌어안을 필요가 있다.

@BingImageCreator #장미를_품에_안은_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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