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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유 Oct 13. 2023

흔적과 흉터에 관하여

사람을 사랑한다는 건 뭘까. 

  ―한 사람에게 흔적을 남기는 일이다. 


 나의 삶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이가 들수록 여실히 느낀다. 내가 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지울 수 없는 낙인처럼 수많은 사람의 삶이 새겨져 있다. 가장 먼저는 부모님과 형제자매이며, 선생님과 친구들, 유년 시절의 기억, 읽고 배우고 쓴 것들, 보고 들었던 여러 가지. 언제부터 새겨졌나, 그 기원을 찾는 건 무의미한 일이다. 우리는 본능에 따라 살아가는 탄소 생명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그것의 조합이 없다면 우리가 성격이라 부르는 것도, 개성이라 부르는 것도 없었겠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나를 바꿀 수 있다. 이는 생각할수록 이상한 일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누군가의 영향을 받지만,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존재에게는 반항한다. 부모님의 잔소리, 선생님의 지적, 친구들의 하찮은 조언과 충고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싫어하면서, 어째서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을 바꾼단 말인가. 스며들듯이 다가오는 당신의 그림자를, 어째서 나는 밀쳐내지 않고 오히려 반갑게 맞이했단 말인가.


 그것은 상대방이 그러하듯, 나 또한 상대방에게 흔적을 남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랑을 하는 너와 나에게는, 서로의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다. 내가 당신을 볼 때 나의 흔적을 보게 된다. 당신 역시, 나를 볼 때 당신의 흔적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실로 자기애의 미학이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지만 또한 당신에게 새겨진 나의 흔적을 사랑하는 일이다. 그러니 당신을 위해, 당신 때문에 내가 변화했다는 말은 틀렸다. 나는 당신을 위해 바뀌지 않았다. 당신에게 새겨진 그 흔적을 보고, 환멸과 경이와 역겨움과 자부심을 느끼며 바꾼 것이다. 나는 나를 위해 변화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사람을 사랑했다는 걸 뭘까.

 ―한 사람으로부터 새겨진 흔적이 흉터가 된다는 뜻이다.


 이별 뒤에 남는 것은 당신으로부터 새겨진 당신의 흔적들이다. 처음에는 기꺼이 맞아들였던 당신의 흔적들은, 순식간에 상처가 되어 아린다. 당신에게 받았던 모든 사랑의 흔적들이, 비극적이게도 모두 상처가 된다. 함께했던 행복한 시간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절망의 시간으로 변하고, 함께 나누었던 사랑의 언어들은 떠올리기조차 싫은 비명이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도 그건 불가능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온갖 사랑의 요구들. 당신은 나에게 이런 걸 요구했었지. 하지만 나는 그것까진 할 수 없었어.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이 아닌 걸까. 당신의 사랑은 정말로 진실했던 걸까. 사랑은 끊임없이 확신을 요구하고, 그것은 서로에게 시험과 훈련이 된다.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난도는 점점 높아지고, 그 허들을 뛰어넘을수록 사랑은 깊어지지만, 언젠가 그것을 뛰어넘을 수 없는 순간이 온다. 거기서는 결국 양자택일의 문제다. 더 이상 시험하길 그만두든지, 어떻게든 비루한 몸뚱이를 움직여 한 번 더 도약하든지.


 그러므로 ‘사랑-기계’인 우리 몸은 모순과 오류로 가득하다. 우리는 사랑을 확신하고 싶지만, 확신하는 그 과정에서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수많은 흉터들. 그 흉터는 때로 우리를, 우리의 사랑을 단단하게 만들어 주지만, 절대 아물지 않는 상처가 끊임없이 재발할 때, 결국 우리는 서로를 등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정말로 안 맞는다고 생각하며. 슬프게도, 처음에는 분명 잘 맞는다고 생각해서 사랑을 시작했을 터인데.


 상처가 된 흔적을 견뎌야 한다. 그리고 끝내 그 흔적이 정말로 나의 것이 되기까지 기다려야 한다. 이제 막 ‘슬픔이 없는 십오 초’가 지났을 뿐이다. 공감해 줄 사람이 더는 없는, 십오 초라는 시간이.


@BingImageCreator #반고흐_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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