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다가오면 늘 한 번씩은 하게 되는 요리가 있다. 바로 방울토마토 마리네이드.
식욕을 되살리는 그 맛. 새큼상큼달콤한 그 맛. 생각나던 차에 남편이 때마침 방울토마토 한상자를 사왔다. 나이스 타이밍!
방울토마토를 모두 큰 볼에 후두두두둑- 털어 넣고 차가운 물을 듬뿍 붓는다. 식초도 한스푼 넣어준다. 잠시 딴청을 피우다 돌아와 방울토마토의 초록꼭지를 하나씩 떼어내며 흐르는 물에 깨끗이 뽀득뽀득 세척한다. 도마와 칼을 준비하고. 방울토마토 꼭지 부분에 열 십자 모양으로 칼집을 낸다. 팔팔 끓는 물에 토마토를 담고 토마토 꼭지 부분이 갈라지며 문어 소시지처럼 보일 때쯤 불을 끄고 망에 넣어 찬물로 헹군다. 방울토마토를 식힌 뒤 껍질을 벗겨낸다. 멍- 때리면서 껍질을 벗기는 시간은 힐링 그 자체. 이런 게 바로 요리멍 아닌가 싶은데.
껍질을 벗겨낸 토마토가 가득 담긴 볼에 양파를 잘게 썰어 넣는다. 치즈가 있으면 치즈도 잘게 잘게 썰어서 취향껏 양껏 마음대로 넣는다. 예전에 사진과 함께 기록해둔 레시피를 찾아 재료들을 슬쩍 체크하고 준비한다. <올리브오일, 식초, 레몬즙, 알룰로스, 간장, 후추, 설탕, 소금>. 올리브오일이 없어서 이번에는 포도씨유로 대체. 두세바퀴 휘- 둘러주었다. 레몬즙도 한두바퀴 휘- 둘러주고. 식초는 반스푼쯤 넣어주었다. 알룰로스도 한두바퀴 슉- 신나게 넣어주고. 간장은 한스푼쯤. 후추 톡톡. 설탕과 소금도 그냥 톡톡 정도로. 이제 즐거운 조물조물 시간. 방울토마토의 빨강과 양파의 하양이 섞이면서 그 생생함이 배가 되는 기쁨의 시간이다. 마지막으로 파슬리 송송. 나는 파슬리를 참 좋아한다. 그냥 파슬리를 뿌리는 그 순간을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나에게 있어 파슬리는 요리와 낭만의 상징 혹은 환상 같은 그런 것일까. 어쨌든 이렇게 토마토 마리네이드가 완성되었다. 냉장고에 잠시 넣어두었다가 꺼내 먹으면... 신세계 영접. 감히 ‘천국의 맛’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빙수처럼 숟가락으로 듬뿍 떠서 한 입 크게 먹으면. 입 안 전체에 가득 퍼지는 생생한 살아있음의 맛. 행복의 맛. 기쁨과 환희의 맛. 그 시원상큼한 정화의 맛. 리셋의 맛이라고 할까. 내 일상에 새로운 즐거움을 가져다줄 것만 같은 기대를 품게 하는 그런 맛.
습도가 높아지고 후덥지근한 기운이 느껴질 때. 남편의 말 한마디 몸짓 하나하나가 거슬림으로 다가오기 시작하는 것을 감지할 때. 주변 사람들의 행동 하나하나에 기분이 괜스레 쎄하고 이상하게 느껴질 때. 잠깐 마주치는 이웃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기꺼이 냉담과 쌀쌀의 시선을 읽어내고야 말겠다는 태세를 갖추려는 자아의 장난질을 포착할 때. 애써 아닐 거야 아닐 거야 나의 환상이지. 망상이지. 이런 고약한 자아의 성질머리란, 하며 내 마음을 달래며 우울감으로부터 벗어나려 애써볼 때. 실망과 좌절과 그런 부정적인 감정들이 나에게 달라붙어 끈적거릴 때. 몸과 마음과 정신이 무거울 때. 이런 축 쳐지는 기분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또다시 어찌할 줄 몰라 가만히 그 자리에서 가라앉아버리고만 싶을 때.
토마토 마리네이드를 한 입 먹고 나는 새로운 세계로 풍덩- 시원하게 빠졌다.
나에겐 몇 번의 여름이 남아 있을까?
갑자기 어디선가 들어봤던 것 같은 이런 질문이 떠올랐고, 이런 대답이 따라왔다.
산다는 것, 참 별 것 아닌 것을.
흐르는 계절 따라 신선하고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면서 그렇게 살면 되는 것을.
슬픔과 고뇌 따위 벗어던지고 지금 이 계절에 시선을 돌리면 되는 것을.
가뿐하고 가볍게
마음과 머리를 채우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을 기꺼이 내려놓고
훌훌 털어버리고 자유롭게
지금 이 순간 속에서 행복과 마주하면 되는 것을.
“선생님, 노잼 시기 왔어요? 행복, 그거 별 거 없어요. 우울하면 맛있는 거 먹어요.”라고 말해주던 그저 해맑고 때묻지 않은 개구쟁이 말괄량이 학생들의 말이 떠오른다. 이제는 모두 사회인이 되어 잘 지내고 있겠지? 맛있는 거 먹으면서 단순하게 행복하게 그때처럼 잘 살고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땐 그 애들이 참 부러웠고, 그런 내가 부끄러웠고, 그럼에도 그 애들의 기운과 에너지를 참 사랑했었다. 그 애들에게 참 많이 의지했었다. 고맙고 창피하고 쑥스러운 기억이 갑자기 마음에서 피어오른다.
그 애들 말이 맞다. 행복이 뭐 별건가. 정말. 지금 이 순간 내가 살아있는 것이 곧 행복이지. 살아서 눈앞에 있는 맛있는 거 먹는 게 행복이고. 먹고 싶은 거 만들어먹을 수 있는 것은 또 얼마나 대단하게 행복한 일인지.
맛있는 거 먹고, 햇빛 쐬고 바람 맞으며 자연을 감상하는 일.
그저 이렇게 살아가는 일.
살아가는 일, 참 별 거 아니다. 그리고 참 단순하게 별 거다.
흘러가는 찰나의 행복. 요리에 듬뿍 담아내어 맛있게 먹어야지.
나의 그 모든 심각함과 무거움을 날려줄 상큼한 방울토마토 마리네이드. 그 안에 담긴 행복과 사랑. 기쁨과 환희. 그 모든 것에 나는 지금을 참 잘 살고 있다는 기분 좋은 안정감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