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날씨가 참 오락가락이고, 날씨 따라 내 몸 상태도 참 오락가락이다. 입맛도 없고 무엇을 먹어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 며칠 전에는 그냥 있는 재료로 카레를 만들었는데 감자를 너무 많이 넣었는지 먹고 나니 배가 더부룩하고 뭔가 몸이 찌뿌두둥한 불쾌함을 경험했다. 뭔가 정화를 필요로 하는 내 몸. 바닷바람 맞으며 시원하게 달리며 땀을 흘리고 싶어 하는 나의 몸속 장기들. 감기를 핑계로 며칠 웅크려 지냈더니 이 작은 요정들이 나에게 시위를 벌이는 듯 하다.
딸아이도 콧물을 줄줄 흘려대니 병원에 안 갈 수가 없었다. 딸의 병원 방문을 겸해 엄마도 진료를 받기로 했다. 약을 받고 곧장 집으로 돌아오려는데 아이가 뛰어놀고 싶다는 강력한 외침을 보내기에 차를 멈춰 세우고 바닷바람 맞으며 산책을 했다. 감기가 더 심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잠시 애써 외면한 채로 신나게 바람을 맞고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보고 구름에게 인사를 했다. 그렇게 신나게 신나게 걷고 또 걷고 달리고 또 달리고, 그런 일요일의 오후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남편이 운동도 할 겸 시장에 다녀오겠다고 한다. 무엇을 사올지 묻는 남편에게 몹시 어려운 주문을 내렸다. “뭔가 가볍고 시원하고 맑고... 그런 것 좀 사다 줘요. 뭔가 정화가 필요해. 무거운 몸과 마음 다 씻어내고 싶은 기분이야.” 남편이 “해조류? 해산물?”이라고 묻기에 “잘 모르겠어요. 그냥 좀 자연밥상을 차리고 싶네. 밥에 된장국에 김치만 먹으면서 다시 가벼워지고 싶은 그런 기분이야.”
시장에 다녀온 남편의 장바구니에는 꼬막 한 봉지와 딸기 한 팩, 양파 한 봉지 그리고 가지와 오이가 담긴 봉지 하나가 담겨 있었다. 그중에서도 순간 내 멈춰있던 살아있음의 감각을 다시 일깨운 녀석은 바로 오이였다. 찐한 녹색 빛의 피부를 가진 그 녀석들이, 그 생명력의 기운이 나의 심장을 제대로 건드린 것이다. 금세 기분이 좋아졌고 설레기 시작했다.
오이를 씻고 양쪽 끝을 자른 후에 필러로 듬성듬성 껍질을 벗겨내었다. 그리고 반으로 자른 뒤 어슷썰기를 했다. 반달모양의 오이들을 볼에 넣은 뒤 <간장, 참치액젓, 설탕, 참기름, 깨>를 조금씩 넣은 뒤 조물조물해주면 반찬 하나 완성이다. ‘아삭아삭 너무 맛있다, 호호’ 이런 생각을 하고 기분 좋은 느낌을 감각하면서 오이 반쯤을 반찬통에 옮겨 담았다. 볼에 남은 오이에는 고춧가루를 추가해서 매운 버전으로도 만들었다. 다른 재료들은 다 똑같고 고춧가루 하나만 추가되었을 뿐인데 어쩜 이리 다른 맛이 날까 신기해하면서 두 번째 요리를 반찬통에 옮겨 담는다. 이렇게 남편이 좋아하는 ‘분산투자’(남편은 ‘균형발전’으로 순화해서 표현하자고 주장한다.) 개념을 적용한 일석이조? 일거양득?의 요리가 탄생했다.
국도 만들어야 하는데... 음, 남은 오이로 오이냉국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냄비 크기의 큰 유리반찬통에 끓인 후 식힌 물을 반쯤 채운 뒤 된장 한 스푼을 풀고 참치액젓을 한 스푼 넣은 뒤 채썬 오이를 듬뿍 담고 깨를 송송 뿌려 저어주면 간단하게 오이냉국 뚝딱 완성이다. 뚜껑을 덮고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가 시원하게 먹으면 동치미국물처럼 별미가 된다. 남은 채썬 오이들은 꼬막비빔밥에 넣어서 다른 재료들과 같이 비벼서 먹었고, 이렇게 오늘은 이렇게 오이밥상으로 시원하게 샤워를 했다.
답답했던 가슴이, 꽉 막힌 것 같았던 마음이, 뻐버벙 뚫려나가는 기분이 들었고, 몸 한가운데에 새로운 새싹이 돋아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쌓여있는 모든 불순물을 단번에 제거하고 그저 맑고 순수하게 다시 태어나고 싶은 갈망을 달래주는, 무거우면서 허한 그런 어찌할 수 없는 막막한 기분을 시원하게 해소해주는, 딱딱하게 굳어지려 하는 몸과 마음에 상쾌한 공기를 불어넣어주는, 그런 음식들을 먹고 있다고 느꼈다. 다시 삶으로 향하는 길목에 반갑게 피어있는 네잎클로버를 손에 가득 쥔 듯한 그런 행운을 맛보며 나는 오이를 온몸으로 기쁘게 받아들였다.
맑아진 영혼을 느껴본다. 순수해진 마음을 느껴본다. 아직도 추상적으로만 어렴풋이 알고 있는 휴식의 의미를 천천히 곱씹으며 몸으로 느껴보려 노력한다. 속도를 줄이고 줄이고 또 줄이면서 느리게 느리게. 느리게 생각하고 느리게 느끼고 느리게 살아가려 노력한다. 먹는 일도 읽는 일도 쓰는 일도 그렇게 차분하게 여유를 가지고 서두름이 없이 해나가리라 다짐한다.
오이가 나에게 전해준 그 찐한 녹색의 빛, 강한 생명의 기운. 이 싱그럽고 튼튼한 오이의 이미지와 오이를 먹고 되살아난 지금 이 살아있음의 감각. 잊지 않고 오래오래 기억하고 자꾸자꾸 떠올리며 살고 싶다. 힘들어도, 아주 힘들어도, 깊은 어둠 속에서도, 믿고 의지하며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그런 견고한 사랑과 희망의 상징으로. 나는 투박하게 놓여 있는 오이들을, 무심한 듯 쿨하게 나를 바라보며 깊은 애정을 보내오는 오이의 크나큰, 그 단단한 존재감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