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 속 샛노란 희망

소설 레몬 - 사랑보다 어려운, 삶

by 투명서재

상실 속 희망


레몬


권여선 저, 창비, 2019년 04월 22일


한줄평 : 소설보다 더 감동적인 작가의 말, 작가의 말로 진심 위로받았다. 사랑보다 어려운, 삶





나는 노란 치마를 입어본 적이 있었던가? 사회 초년생 때 뭣 모르고 연노랑 투피스를 입은 적 있었다. 당시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지금 떠올리면 병아리가 연상되어 낯이 붉어진다. ‘노랑’은 주목하게 하는 색이다. 소설 ‘레몬’에서는 온통 노랑 빛으로 가득하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언니 해언이 입고 있었던 노란 원피스와 동생 다언의 노란 원피스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노란 원피스를 입은 해언이 죽자 다언은 시간이 좀 흐른 후 언니와 같은 얼굴로 성형수술을 한다. 스무 살이 지나고 다언은 언니 해언을 살해했을 것 같은 용의자 한만우를 만난다. 다언은 점차 진실을 알아가고 언니의 복수를 위해 계획을 세우고 결행한다. 과연 복수는 성공했을까?


이 소설은 ‘아름다움’은 어떤 것이고 아름답기에 억압받는 해언을 보여준다. 가장 활짝 핀 꽃이 먼저 꺾이듯 해언은 19살 여름날 갑자기 죽는다. 해언의 죽음이 어머니와 동생 다언에게 미치는 여파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가족과 갑작스러운 사별 후의 삶은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특히 범죄 피해 가정일 경우. 피해자만 죽은 게 아니라 가까운 이의 영혼도 일부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아름다워서 평범할 수 없던 해언과 평탄하지 않은 가족, 한 많은 한만우의 생은 어떻게 끝나는가? 신은 존재하는가?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세상은 어때야 할까? 언니 해언이 죽고 난 뒤 다언의 질문일 것이다.


작가는 샛노란 색의 연상과 함께 동어를 반복한다. 비슷하거나 다른 뜻을 가진 단어들을 배치하여, 인물들끼리 비교 대조하며 조금씩 핵심에 다가가고 있었다. 줄거리, 결말에 대한 해석을 독자마다 조금씩 다르게 할지 몰라도 이 소설을 한두 번 읽으면 각 인물이 어떻게 ‘살아진’ 건지 알 수 있다. 살아간 게 아니다. ‘살아진’ 거다. 해언이 죽은 사건과 관련된 인물들은 모두 나름의 상처와 짐을 가지고 산다. 그 누구도 100 퍼센트 피해자, 100 퍼센트 백프로 가해자는 없었다. 해언의 죽음 이후 당연하게도 그들 모두 아팠다.


특히 다언의 언니 해언을 잃은 아픔을 드러내는 심리 묘사는 놀라웠다. 권여선 작가는 이렇게 힘든 사람의 말을 실제로 들어보신 적이 있었는지 생생했다. 외상 증상(trauma symptoms)은 감정조절 어려움, 원치 않는 생각이 불쑥 떠올라 반복, 망각, 해리 증상을 보인다. 해언은 특히 어머니가 자기를 언니 보듯 하는 시선에서, 언니 대신 네가 죽었다면 하는 무언의 바람으로 인해 언니 얼굴처럼 성형수술을 받게 된다. 다언은 몸만 커졌을 뿐, 심리적인 나이는 열일곱의 언저리에 멈춰있다. 그녀는 자기 대신 언니가 되기로 선택한다. 언니를 잃은 상실감은 언니나 그 사건을 연상할 만한 것을 회피한다.


어째서 그런 일이 다언 자신이나 언니에게 일어났는지 이유를 찾으려 한다. 이유를 찾아내지 못하면 비합리적인 신념을 만들어낸다. 다언은 자신이 수치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자기도 없애고 싶지만, 차마 어머니가 딸 둘을 잃게 할 수는 없으므로 실행하진 못했을 것이다.


각 인물이 그 사건 이후, 내 삶을 어찌할 수 없으니 원점으로 돌아갈 수도 이미 선을 넘어섰다. 죄 많은 고독을 어쩔 수 없이 이어가야 한다는 인간의 숙명을 갖고 있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무겁고 음울하기만 한가? 내가 이 소설을 다 읽고 뭉클함과 먹먹함으로 눈물이 났던 이유는 ‘그럼에도’ 생을 힘껏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 때문이었다. 다언, 다언의 어머니, 한만우, 만우의 동생 말이다. 소설에서 상처 외에도 그들이 어떻게 생존하고 치유하는지를 보여준다. 상처를 주고받기도 하지만 그들이 살아가게 만드는 것도 가족과 주위 사람이지 않을까...


이 소설에서 노랑은 치유의 색이다. 계란 노른자의 아름답고 영롱한 빛과 레몬의 샛노란 자태, 하얀 속살을 드러낸 참외는 복수를 꿈꾸는 희망이자, 침이 고이고 입맛이 당긴다. 다언이 한만우의 집에서 경험한 당혹스러운 식욕과 생의 충동이다. 한만우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측은지심이 든다. 해언의 무방비로 벌려진 무릎과 한 많은 한만우의 아픈 무릎, 해언과 혜은, 혜은과 은혜는 모두 짝을 이루어 배치되어 있다.

다언이 한만우의 집으로 들어가는 장면부터 그 집안에서 ‘먹는 행위’가 위안이 되었다. 다언의 복수 방식은 분명 잔인하지만, 그녀가 훔쳐 온 ‘생기’는 다언과 어머니의 희망이 되었다. 한 많은 인물의 비극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 표지 속 레몬의 노랑처럼 긍정, 따뜻함이 느껴진다.


노랑색 같은 참 신기한 소설이다.


사진 출처 : yes24 레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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