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과도하게 애쓰지 말아요 우리
얼마 전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를 재밌게 봤어요. 대사 중 좋은 말, 좋은 생각, 좋은 행동이 기억에 남았어요. 아버지와 주인공 프레디 머큐리가 껴안는 장면에서 울컥했습니다. 여기서 좋음은 선, 착함, 잘한다는 의미입니다.
프레디 머큐리 아버지가 이민가정으로 살아남기 위해서였는지, 그도 가정에서 그렇게 세뇌당했는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좋음에 대한 강조는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예부터 예의, 착함을 중요하게 여겼잖아요. 언제부터인가 착하다는 말은 칭찬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이야기에 요즘 엄마들은 착하다라는 말을 자주 쓰진 않는듯합니다.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 싶었던 프레디 머큐리, 하지만 아버지와 사회에 받아지려면 자기가 원하는 모습과는 달라져야한다는 걸 일찍부터 알게 됩니다. 아이처럼 칭찬 받기 위해선 자기 자신이 될 수 없었어요.
이름을 바꾸고 아버지의 뜻과 다른 선택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은 곳에는 아버지에게 있는 그대로 수용되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고 싶었어요. 상처받은 내면아이의 욕구가 느껴졌어요.
프레디 머큐리는 좋음이 공동선을 위한 편의에서 나온 기준이며, 좋음이라는 덫에 창의적인 개인은 종종 희생되기도 한다는 것을 간파한 거죠.
저는 상상해 봅니다.
만약 그의 아버지가 좋고 나쁨의 기준조차 모호하거나 없었다면 그가 이렇게 개성있는 뮤지션으로 역사에 남았을까? 좋고 나쁨의 구분선이 명확할수록 좋음을 허용하는 테두리가 좁을수록 아이들은 선을 넘고 싶습니다.
유아기 때 훈육 중 되는 것과 안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뭐든 과유불급이죠. 선악과 되고 안되고의 기준을 과하고 경직되게 적용할수록 아이는 나쁜 게 무엇인지에 대한 호기심이 커지고 그것을 시도해보고픈 충동에 사로잡힙니다.
부모가 좋음만 강조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영화에서 잘 보여줍니다. 부모가 가장 취약하고 제일 싫어하는 면은 어떻게 억압되는지 말이예요.
저는 프레디 머큐리의 성적 취향(개인의 취향이기에 그걸 나쁘다고 표현하는 건 아닙니다.), 적나라한 가사, 6분 이상 되는 곡, 악기 다루는 방법, 파격적인 의상, 기존의 방송국이나 음반제작사의 룰에 따르지 않는 행동들이 기존의 좋음(기준)을 깨고 부수고 갖고 노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사회에서 용인되지 않는 것이자 아버지께서 나쁘다고 하실법한 것들이었으니까요.
제 지인도 부모가 어릴 때 심하게 제한을 두자 청개구리처럼 행동했었답니다. 가장 큰 사건이 자기도 모르게 불을 낸 것이었어요.
제가 상담했던 아버지는 욕하는 걸 끔찍이 싫어해 모범을 보였는데도 아들은 욕을 입에 달고 삽니다.
책 '대한민국 부모'에는 다른 욕구는 절대 없는 것처럼 공부에만 몰두하게끔 어머니가 헬리콥터맘처럼 학원과 집으로만 데려다주었는데 임신한 모범 여고생도 있었어요.
이렇게 부모가 자신의 기준을 강요하고 지킬때만 자신의 자녀라 인정하고요. 기준을 지키지 않는 모습은 무시하거나 타박할 때 아이들은 화가 납니다. 둘 다 자기인데 한쪽만 인정받으니 다른 한쪽은 마치 없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아이 안에서도 자신의 모습이 분리되는 거에요. 자기가 보기에 좋은 모습은 다른 사람에게도 보이지만, 부모가 싫어할만한 모습은 점점 감추게 됩니다.
저는 영화를 보고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가해자인 딜런의 엄마이자 책의 저자 수 클리볼드가 떠올랐어요. 아이가 학교에 그럭저럭 적응하고 몇몇 친구들과 잘 지내는 괜찮은 모습만 눈에 들어왔고 왠지 어둡고 우울한 모습은 간과했던 거에요.
우리는 자녀의 좋은 모습만 잘하는 것만 필터에 걸러져 눈에 보이길 바라는 건 아닐까요?
그녀도 우리처럼 충분히 좋은 보통 엄마였어요. 천생 교육자로 평범하고 상식적인 장애인 학교 선생님이었습니다. 취미로 그림을 그렸고 다정한 이웃이었습니다. 사회생활, 봉사활동을 통해 주위 관계도 잘 맺어왔기에 아들이 다른 사람을 살해하고 자살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딜런이 부모로부터 배웠던 감사, 예의, 배려, 사랑이 딜런이 자살 충동을 느낄 때는 무용지물이 되었습니다. 부모에게 자녀가 마음 속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얘기할 수 있을 만큼의 공간, 시간 여유가 없었던 거에요. 아이가 어떤 모습이든 허용할 수 있는 범위를 넓혀가야 합니다.
아들에게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가치만 강조했기에 아들도 어머니에게 자기 안에 있는 자살충동과 살해 욕구를 말하기 어려웠을 것 같아요.
좋음만 강조하는 아버지 밑에서 '나쁨'이라고 생각되는 걸 시도해보았던 프레디 머큐리, 어린 시절 나쁨을 어느 정도의 한계선에서 허용했다면 어땠을까요?
선한 거짓말, 친구나 동생이 미워 몰래 꼬집거나 쥐어박는 행동을 한번쯤 모르는 척 넘어가면 어떻게 될까요?
부모의 어린 시절 상처, 열등감, 무의식을 알고 아이에게 그 영향을 최소화하는 겁니다.
나는 뭐 때문에 좋음을 내세울 수밖에 없고 아이에게 좋음이 없을 때 나는 어떤 게 느껴질지 부모를 먼저 돌아보는 거예요. 내가 조금이라도 좋지 않은 행동을 보이며 부모님께 야단 맞았거나 내가 어떤 기준(선)을 넘으려 한 발짝 떼자마자 부모님이 불안해하셨는지 등이요.
실천하기 어렵게 느껴지죠?
부모 자신의 이해가 먼저입니다. 나를 알아야 자녀를 균형있게 키울 수 있습니다. 내 열등감(콤플렉스)으로 인해 자녀에게 큰 그림자를 드리우고 멍에를 지울 수 있어요.
자녀가 심리상담을 받을 때 부모상담이 꼭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부모가 과하게 억압하는 부분은 자녀(특히 심리적으로 가장 취약하거나 제일 어린 자녀)에게 드러나게 됩니다. 가족치료에서도 부모가 참았던 욕구나 행동이 마치 풍선 한쪽을 누르면 한쪽이 볼록하게 튀어나오는 것처럼 자녀에게 표현됩니다.
질문 1. 부모님(주양육자)께서 특히 싫어하거나 제한했던 말이나 행동은 무엇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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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2. 1번에 적은 내용이 부모님의 성장사에서 경험한 상처나 열등감(콤플렉스)와 비슷한가요? 관련있다면 구체적으로 적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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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3. 내가 자녀에게 강조하는 가치관은 뭔가요? 또한 제한하는 행동은 어떤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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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4. 3번의 가치관과 행동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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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5. 나의 어린 시절 경험에서 영향을 준 게 있다면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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