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곰의 선택

63[오늘이라는 삶은 처음이라 그래]

by 회색달


원래는 바다에 가려했다.

숙소도 예약했고,

맛집 리스트도 만들고.


파도 소리 상상만 해도 기분 좋았다.

몸은 아직 집인데

마음은 이미 해변에 누워있었다.


근데 비란다.

그것도 주말 내내.


호텔을 취소했다.

모처럼만의 기분까지도 지워졌다.

그래도 뭐, 어쩌겠나.

‘비 오는 날은 집이 최고지’

자기 합리화를 해봤다.


마트에 들러

과자 좀 사고,

냉동식품도 장바구니에 담았다.

이것도 나쁘지 않다 생각했다.

그때까진.


집 앞 주차장이 만차였다.

비상등 켜고 이중주차를 해뒀다.

몸이 너무 무거웠다.

‘눈만 살짝 붙일까?’

그리고는 내 방 침대에서

그대로 저녁까지 잠들었다.

진짜, 저녁.

여섯 시.


불현듯 ‘차’가 생각났다.

미친 듯이 뛰어 내려갔다.

비상등은 꺼져 있었고

시동은 안 걸렸다.

방전.


허탈하다는 말,

그럴 때 쓰는 거더라.

욕이 목까지 차올랐고

‘아 진짜 내가 왜 그랬지’

자책이 덕지덕지 붙었다.

며칠 전 동료가 했던 말도

귀신같이 떠올랐다.

“비상등 오래 켜두면 방전돼.”


나는 그 말을 들었고

알고 있었고

그래도 까먹었다.


습관처럼 했던 내 행동을 원망했다.


저녁 일곱 시 계획된 테니스 경기 시간은

다가오고

방전된 차 안의

마트 냉동식품 생각하다가

그냥 멍해졌다.


그렇게 앉아 있다가

갑자기 어떤 문장이 떠올랐다.


“운명이 모든 걸 빼앗아도

내 선택은 빼앗을 수 없다.”


운명이 모든 걸 빼앗아도
내 선택은 빼앗을 수 없다.
-위지안. 내가 살아가는 이유

그 말이 마음 한가운데 툭, 하고 떨어졌다.


그래,

지금은 망했어도

이게 결론은 아니지.

어떻게든 선택은 할 수 있지.


심호흡했다.

‘짜증 나 있다’

‘조금 슬프다’

그 감정들을 그냥 바라봤다.

억지로 털어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정했다.


그다음엔 걸었다.

음악 들으면서

천천히 동네를 돌았다.

머리가 조금씩 정리됐다.


택시를 불렀다.

경기장에 갔다.

경기 중에도 계속 생각났다.

방전된 차 안에서 느낀

그 이상한 무력감.


하지만 돌아보면,

그때 내가

내 감정에 너무 끌려가지 않고

작게나마 선택을 했다는 게

좀 괜찮았다.


살다 보면

계획이 틀어지고

기분이 엉망이 되고

차가 방전되듯

내 의욕도 방전된다.


그럴 땐

잠깐 멈춰서 숨 쉬고

한 바퀴 돌고

뭔가 하나라도

내가 정할 수 있는 걸 찾아보는 것.

그게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일 수도 있다.




https://youtube.com/shorts/sWn7RXrSrU8?si=8NcuUt5w1QNErWPx

곰 보다 못할 수는 없지~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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