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날, 5층 소아병동에는 일찍부터 사람들로 시끌벅적하였다. 차분하고 조용했던 평소 분위기와 분명히 달랐다. 크리스마스 이후 오랜만에 웃는 아이도 있었다. 이토록 싱싱하고 힘찬 기운에 간호사도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소녀를 만나러 갔다. 소녀가 있는 병실에 다다른 간호사는 캐릭터 머리띠를 벗어 몸 뒤로 숨겼다. 정적 속에 잠긴 병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소녀의 침대를 가로막고 서있는 커튼 아래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슬리퍼가 눈에 들어왔다. 간호사는 뒤돌아서 조심스레 문을 열고 소녀의 병실을 나갔다.
“따깍”
문 닫는 소리와 함께 복도에서 병실로 들이닥친 소음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그제야 눈을 뜨는 소녀.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텅 빈 공중을 향해 있는 소녀의 눈빛이 건조하다. 또 한 번 눈을 껌뻑 이는데 눈물샘이 말라비틀어져서 눈을 뜨는데 한참 걸렸다. 마치 각막이 동공을 삼켜 버린 것처럼 눈이 풀려 있었다. 완전히 의욕을 상실한 눈, 그런 눈빛이었다.
사람이 살고 있는 바위섬이 있다. 이곳은 온통 흰 눈 색이다. 여기에 소녀가 살고 있다. 몸이 아프고 부모에게 버림받은 이 소녀를 사람들은 가엽게 여겼다. 하루빨리 좁고, 답답하고, 고독한 저 하얀 바위섬에서 소녀를 꺼내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소녀는 사람들이 내민 구원의 손을 이제는 잡지 않는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소녀의 부모 때문이었다. 이들은 소녀와 세상이 어렵게 엮은 삶의 끈을 모질게 끊어버렸다. 소녀는 이들에게 순종하지 않지만 이겨 낼 재간이 없었다. 세상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소녀는 세상을 향한 믿음을 바다에 던져버리고 스스로 만든 바위섬에 들어가 버렸다. 세상으로부터 등을 돌린 소녀! 암덩이가 소녀의 마음에도 꽈리를 튼 것이다. 소녀가 안쓰럽다.
7년 전, 소녀는 암 진단을 받고 투병 생활을 시작했다. 비록 암이기는 하지만 제 때 종양을 제거하고 약물치료를 병행하면 충분히 완치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소녀의 부모는 소녀를 철저히 외면했다. 병원과 치료는 말할 것도 없이 오로지 자신이 믿는 신에게 기도만 할 뿐이었다. 오직 신앙의 힘으로써 암을 치료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참으로 어리석은 부모다.
가여운 소녀는 점점 뼈만 남은 상태로 변해갔다. 그 안에 5kg의 종양이 기생하고 있었다. 소녀는 너무 아팠다. 부모를 향해 아프다고, 치료받고 학교에 가서 친구들과 뛰어놀고 싶다고, 나도 이 세상에서 행복하고 싶다고, 천국에서 행복하면 무슨 소용이 있냐고 부모를 향해 절절하게 애원했다. 소녀의 처지가 비참하다.
“아파. 참는 데까지 참는데, 이제 견디기가 너무 힘들어. 고통 좀 덜하고 싶어.”
“내게 말하지 마. 신께 호소해. 나는 안 두려워. 신 안에서 죽으면 편안해. 고통도.”
암담한 일이다. 삐뚤어진 인간의 빼뚤어진 신앙 때문에 소녀가 죽어가고 있었다. 아, 신이 시여! 당신은 지금 어디에 계신 단 말입니까?
오전 10시. 소녀가 있는 병실에 햇살이 얼굴을 비추기 시작했다. 창가 옆에 놓여 있는 작은 연못엔 무지개가 걸렸다. 병실 곳곳에 걸려 있는 바람개비가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빛은 찬란했고, 바람은 따뜻했다. 소녀의 바위섬에도 오월의 햇살과 봄바람이 이르렀다. 굳게 닫힌 커튼에게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커튼은 온몸으로 빛을 안았다. 봄바람이 커튼에게 속삭였다.
‘소녀를 만나고 싶어.’
‘팔랑팔랑, 팔랑팔랑. 왜 이제야 온 거니? 소녀가 널 많이 기다려. 팔랑팔랑, 팔랑팔랑.’
하얀 바위섬 안으로 한 줄기 빛이 들었다. 그 빛은 소녀의 발을 지나 어깨에 머물다 입, 코, 눈으로 다가갔다. 소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소녀인데, 아직도 열두 살 어린이인데! 애처로운 얼굴이다.
‘자, 어린이날 선물!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햇살과 바람이 소녀를 간헐적으로 간지럽혔다.
‘아저씨? 아저씨예요?’
그러나 소녀는 눈꺼풀을 들어 올릴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아저씨!”
소녀는 아저씨를 크게 불렀다. 하지만 입술을 조금 떤 것에 불과했다.
‘자, 하나, 둘, 셋 하면 후~ 하고 부는 거야!’
소녀는 케이크를 먹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쓰임새는 알고 있었다. 소녀에게 케이크는 행복이다.
케이크에 나이만 큼 초를 꽂았다. 성냥으로 초에 불을 붙였다. 주인공은 눈을 감고 소원을 빌었다. 주인공이 눈을 뜨고 입을 초에 가까이 대었다. 촛불이 주인공의 얼굴을 환히 비췄다. 잠시 후 입으로 '후~' 하는 소리와 함께 살랑거리던 촛불이 순식간에 꺼졌다. 주인공을 향해 박수를 쳐주는 어느 행복한 가족의 모습이었다. 소녀는 언젠가 본 적이 있는 TV 속 행복한 주인공을 떠 올렸다.
소녀가 겨우 눈을 반쯤 떴다. 아저씨가 아른거렸다. 흐렸지만 분명 아저씨가 맞았다. 소녀는 조금 더 힘을 내기로 했다. 아저씨를 꼭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소녀는 힘껏 양손을 쥐었다.
"보여요, 아저씨가 보여요!"
아저씨의 양 손에는 케이크가 들려 있었다. 그 위로 촛불이 살랑거리고 있었다. 아저씨 옆에 하얀 옷을 입은 사람도 보였다. 간호사다. 간호사 머리에는 캐릭터 머리띠가 앉아 있었다. 간호사는 머리띠를 벗어 소녀의 머리 위로 살짝 놓아주었다.
‘어떤 소원을 빌 거야?’
“비밀, 비밀이에요.”
소녀의 입술 사이로 남이 듣지 못할 만 큼 나지막이 들렸다. 이제 촛불을 꺼야 할 시간이 왔다. 소녀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하나’
“제 얘기를 세상에 알려줘서 그동안 외롭지 않았어요. 아저씨, 고맙습니다!”
풀렸던 소녀의 동공이 또렷해졌다. 소녀의 눈동자엔 소녀를 보며 활짝 웃고 있는 아저씨가 보였다.
‘둘’
“학교 가고 싶어요. 이제 친구들과 함께 뛰어놀게 해 주세요!”
자신의 눈동자가 얼마나 푸른지 소녀는 알고 있었을까? 하늘보다 더 높고 넓어 보이는 소녀의 눈망울. 누가 보고 있다면 소녀의 눈으로 빨려 들어갈 기세다.
‘셋’
촛불은 자신의 처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옆에 있는 친구들과 춤을 추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후~"
소녀는 촛불을 향해 참았던 숨을 있는 힘차게 내뱉었다. 촛불이 하나 씩 꺼지기 시작했다. 먼저 꺼진 촛불은 하얀 연기를 피우기 시작했다. 한 껏 부풀어 오른 소녀의 양 볼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마지막 남은 촛불까지 꺼지자 소녀의 얼굴에 평정심이 찾아왔다. 스르르 눈을 감는 소녀. 이제야 평온한 잠을 이룰 수 있게 됐다. 병실 유리창에 빗금이 그려졌다. 하늘은 맑고 햇살은 내리쬐는데 비가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