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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되었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생(生)과 사(死) 그 이후의 일상

by 리얼라이어

누구든 생사(生死) 앞에선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에 이른다. 탄생에 웃고, 이별에 운다. 탄생은 신비하고 묘하다. 생물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한 잉태와 출산이라 하더라도 핏덩이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벅찬 가슴을 부여잡기가 쉽지 않다. 신(神)에게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하지만 이별은 애통하고 비통하다. 더욱이 작별인사도 없는 이별은 살아있는 이에게 절규를 안긴다. 죽음으로써 헤어지는 일은 비극이다. 신(神)이 과연 있기는 한 걸까? 드디어 아빠가 되었고, 결국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결혼 생활을 시작한 기혼자들은 ‘결혼은 현실이야’라는 말을 자주 한다. 더욱이 부모가 되면 그 실감의 크기와 깊이를 있는 대로 다 말할 수 없다고들 한다. 적확하다. 엄마, 아빠라는 신분이 다소 멋쩍어 머리 몇 번 긁적이는 것도 아주 잠시다. 엄마, 아빠가 처음이라 실수 투성이다. 내 실수가 열없어서 얼굴이 붉어진다. 어설프고 짜임새도 없으며, 성질이 다부지지 못해 담이 작아진다. 이렇게 점점 부모의 삶에 길들여질 무렵, 전에는 없던 모성애, 부성애가 생긴다. 그러나 무엇보다 부모로서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육아가 사람을 얼마나 지치고 피곤하게 하는 업(業) 인가를 깨닫게 된다. 여기엔 시간, 금전, 정신, 육체, 관계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다.


나는 머리를 말려주는 남자다.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딸아이와 아내의 머리를 말려주는 일을 맡고 있다. 비록 대부분 아이의 머리를 말려주고 있지만 이 또한 몇 해 되지 않았다. 그전까지 아내의 몫으로 당연하게 생각했던 내 시선이 못내 아쉽다. 스스로 빠르게 변화를 줬더라면 보다 긴 시간 동안 미덕 있는 아빠, 남편의 모습이었을 텐데 말이다. 그럼에도 예나 지금이나 양육엔 도무지 재능이 늘지 않는다. 반면 아내는 엄마의 역할을 꿋꿋이 해낸다. 아빠, 남편이라는 이름이 자주 리셋이 되어 아이에게, 아내에게 미안함이 자꾸 자란다. 내가 종종 딸아이에게 하는 말이 있다. 넌 좋겠다고. 만약 아빠가 다시 태어난다면 네 엄마의 딸로 태어나보고 싶다고. 이렇게 말하면 아이는 내게 조용히 다가와 귓속말을 건넨다.


괜찮아, 아빠.
나는 아빠 딸로 태어나서 행복해.


올해 초6이 된 딸아이 머리는 스무 해가 되는 날까지 내가 책임질 것이다.


언젠가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좋은’, ‘멋진’, ‘훌륭한’ 수식을 더하지 말고 그냥 ‘아버지’가 되어라. 어깨 힘 빼고 가슴을 펴라고 일러주셨다. 이는 가부장적이지 않으면서 당당한 면모를 지닌 아버지의 인생과 닮았다. 조금 더 곁에 계시지. 아들이 어떻게 아버지로서 성장해가는지 더 지켜보고 가시지. 어느덧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햇수로 5년이 되었다. 언젠가는 곁을 떠나실 것이라 생각했지만 갑작스럽게 찾아온 병마가 온 집안을 슬픔 속으로 내몰더니 단, 한 달 만에 하릴없게 저 하늘로 소풍을 떠나셨다.


그러기를 얼마 후, 아버지의 일상이 고스란히 담긴 일기장을 발견했다. 울며 웃기를 반복하면서 읽고 또 읽었다. 만약 이것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아버지의 희로애락을 영원히 알지 못했을 것이다. 내 기억에서 사라지고 기억 속에 존재할 리 없는 아버지의 일상을 한 장 한 장 따라가니 미처 몰랐던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는 아내에게 온 정성을 다하는 남편이었다. 그런 사랑꾼의 모습이 일기 곳곳에서 발견된다.


아내가 연이틀간 출근하여 피로가 겹치지 않을까 저으기 걱정이다. 악착같은 마누라. 정말 귀여운 억척이다. 여보. 쉬었다 하시구려. 사랑스러운 나의 여보. 사랑해요. 하늘땅 만 큼. 세월이 갈수록 부인이 사랑스러움 그 자체이다. 2016년 6월 16일 목, 맑음


가깝고 늘 곁에 계셨기에 잘 몰랐다. 가족의 소중함! 아버지가 남기신 유산이다. 조금 전 엄마에게 안부를 묻는 전화 한 통 드렸다. 이것 만큼은 빠뜨리는 일이 없다. 비로소 나는 어버이를 섬기는 자식이 됐다.


누구나 생사(生死)를 겪는다. 많은 것이 변하고 또 많은 것이 바뀐다. 오늘 밤에도 나는 딸아이의 머리를 말릴 것이고, 아침이 오면 엄마에게 안부 전화를 드릴 것이다.


#내인생의큰전환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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