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에 가기로 마음먹다
대학교 졸업 후 PD가 되기 위해 방송국 입사 시험에 매달렸다. 입사하기 어려워 언론"고시"라고도 불리는 이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보통 2년 이상을 시험에 매진하곤 하는데, 나는 8개월 만에 시험을 그만두었다. 창의력과 글쓰기 능력을 주로 본다는 세간의 이야기와는 달리, "암기 시험"에 가까워서 공부가 재미없었고, 20대 청춘의 2년 이상이라는 시간을 온전히 시험 준비만을 위해 바치고 싶지는 않았다. 시험을 포기하니 어떤 일을 할지 막막했다. 동기들이 많이 준비하는 공기업 및 공무원은 안정적이라서 좋지만 평생 할 자신이 없었고, 대기업에 입사하는 건 사람이 아니라 기계의 부품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싫었다. 무엇보다 나는 인문대 졸업생이었다. 환경 탓하기는 싫지만, 실제로 인문대 졸업생들은 취업률이 매우 낮았고 그렇기 때문에 동기들 대부분이 취업 대신 공무원 및 임용고시 준비를 했다. 진드감치 않아서 공부해도 될까 말까 한 시험에 합격할 자신도 없었거니와, 동기들과 비슷한 길을 걷자니 획일적으로 흘러갈 것 같은 내 인생이 싫었고, 안정성만 바라보며 목매듯 취업 준비를 하기도 싫었다. 어떤 이들은 인문대 졸업생이라도 자기소개서를 100개 200개씩 써서 내면 한두 개 정도는 합격한다고, 취업률이 낮다는 핑계 대지 말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노력을 들이면서, 내가 원하지도 않는 직업을 갖고 싶지는 않았다. 고등학교 때부터 반복되었던, 개성을 버리고 사회에 순응하며 사는 인생, 남의 시선을 인식하며 사는 인생에서 탈피하고 싶었다. 그럼 무엇을 해야 한단 말인가?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단 와중에, 서울 종로구 서촌에 있는 한옥 게스트하우스를 관리하는 아는 동생에게 연락이 왔다.
“형 저 곧 세계여행을 떠나는데, 여기 맡아서 관리해 볼 생각 있으신가요? 저번에 놀러 오셨을 때 형이 관심 있어하는 것 같아서요.”
“그래? 민식아 곧 떠나는구나. 준비 잘하고. 거기 일 하기는 괜찮나?”
“좋죠. 자기 시간도 많고요. 한옥 관리하면서 형이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그 일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거예요.”
“음… 알겠어. 생각 좀 해보고 이번 주 주말까지 말해줘도 될까?”
“그럼요. 충분히 생각해보고 연락 주세요.”
한옥 게스트하우스 관리자가 되리라곤 생각도 못 했지만, 고민해보니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월급도 꼬박꼬박 나오고, 자기 시간도 많고, 다양한 사람들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재미있게 일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도 들었다. 주말까지 고민할 필요도 없이, 민식이에게 연락 온 다음 날 그 제안을 수락했다.
애초에, 한옥 게스트하우스 사이드 매니저 일은 2018년 4월 27일부터 그해 12월 31일까지, 약 8개월만 근무할 계획이었다. 이 일을 평생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사실 앞으로 무슨 일을 할 지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아 그 답을 찾기 위해 스스로에게 준 준비 시간이자, 휴식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2018년이 끝나기 전까지는 무조건 진로에 대한 답을 내리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한옥 문을 걸어 나오자고 스스로 다짐했다. 8개월 정도면 충분히 그 답을 내릴 수 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인생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고, 예상한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여름의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고 장맛비가 쏟아질 무렵, 홍콩에서 온 비비안을 만나게 되었다.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홍대에 가서 삼겹살을 먹었다. 1인분에 5,500원 하는 싸구려 삼겹살이었지만, 비비안은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똑 부러지는 그녀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노릇하게 구워진 삼겹살과, 삼겹살 옆에 있는 소주, 맥주잔을 기울이며 우리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국 생활, 홍콩 생활, 한국 문화와 홍콩 문화의 비슷한 점과 다른 점 등등… 이야기를 마치고 커피를 마시며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워킹홀리데이로 2018년 3월부터 약 1년 간 한국에서 생활할 계획을 갖고 한국에 들어온 비비안은 2014년 서울대학교에서 교환학생으로 한 학기 동안 생활한 것을 계기로 한국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한국말을 배우기 시작했고, 홍콩으로 돌아가서도 꾸준히 한국어를 학습하여 나를 만났을 때는 한국어를 막힘없이 구사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발음이 한국사람 같지는 않았지만, 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모습도 또 하나의 매력으로 다가왔다. 처음 만났을 때는 비비안이 언젠가는 본국으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사실이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워킹홀리데이 기간이 아직 많이 남았을뿐더러, ‘그때 되면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이었다. 어머니는 종종 나에게 어떤 일은 굉장히 예민한데, 어떤 일은 전혀 신경 쓰지도 않을 만큼 무심하다고 말씀하시며, 이런 내 모습에 신기해하셨는데 이 경우는 후자였다. 비비안이 언젠가는 홍콩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 “특별히 신경 쓰이지 않았다”라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하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유난히 더웠던 2018년 여름은 어느새 그 기세가 꺾였고, 나뭇잎들은 하나 둘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이 무렵, 비비안은 원래 생활하던 곳에서의 계약이 끝났는데 사이드의 일을 도와주는 조건으로 한옥 안에 있는 나의 사무실 겸 방에서 같이 생활하게 되었다. 이제는 거의 모든 걸 공유하는 사이가 된 것이다. 또, 한옥에 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비비안은 원래 다니고 있던 게임회사에서 했던 인턴생활을 마치고 안국역 근처 카페에서 새롭게 일하게 되었다. 한옥 일이 한가할 때면 카페에 놀러 가 같이 시간을 보내곤 했다. 옷을 갈아입은 나뭇잎들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하자, 나는 다가오는 현실이 조금씩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비비안은 한국에서 정규직으로 취직하지 않는 이상, 여행을 제외하고는 한국에서 머무를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비비안은 계속해서 정규직으로 취직하려고 노력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를 받아 줄 한국 회사는 한 군데도 없었다. 정규직 구직에 실패하자, 비비안은 본국에 돌아가는 것으로 마음을 굳혔다. 비행기표도 샀고, 그녀의 가족들에게 귀국 날짜도 말해주었다.
나는 비비안에게 어떻게 하는 게 좋겠냐고 물어보았다. 비비안은 내가 홍콩에 오는 게 가장 좋지 않겠냐고, 강하지 않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지만 내가 자신을 따라 홍콩에 갈 것이라는 확신은 없는 것 같았다. 우리는 꽤 오랜 기간 동안 우리 관계에 대한 고민을 해야만 했다. 확실한 사실은 비비안은 본국으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자문했다. 비비안이랑 관계를 끝내고 싶은가? 그렇지 않았다. 한국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며 우리는 너무나도 가까워졌다. 그렇다면, 내가 홍콩으로 가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이 선택에는 엄청난 용기가 따랐다. 한국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비비안 하나만 바라보고 다른 나라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홍콩에서 취업이 될지 안 될 지도 장담할 수 없었다. 나고 자란 터전을 떠난다는 건 여러모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러한 고민을 비비안에게 말했을 때, 그녀는 걱정스럽지만 침착한 말투로 내게 말했다.
“괜찮아. 난 운명을 믿어. 우리가 운명이라면 계속 만날 수 있을 거야. 그게 아니라면, 못 만날 거고.”
이 말을 비비안에게서 들은 나는, 이상하게도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운명은 결정된 게 아니라,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야'라고 비비안에게 몸소 보여주듯이, 나는 한국을 떠나 홍콩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홍콩에 와서 비비안과 함께 유튜브 채널을 개설했습니다.
유튜브 채널 소개 및, 홍콩에서의 첫날 공항에서의 모습을 담은(짧음) 영상입니다.
감사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ZVdik5KskY&t=1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