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고, 맛도 좋지만 왠지 모르게 슬픈...
오후 12시 15분에 이륙 예정이었던 인천발 홍콩행 비행기는 제시간에 이륙 준비를 마쳤으나 짐을 부쳐놓고 탑승하지 않은 한명의 승객이 있었다. 기장은 그 승객을 기다리는 결정을 내렸으나,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화물칸에 실린 그의 짐을 찾고 빼내는 데 시간이 좀 더 소요되어, 비행기는 1시가 넘은 시각에 이륙했고 도착 예정 시각보다 50분 정도가 늦은 4시 40분에 홍콩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전날 밤잠을 깊게 자지 못 하여 기내에서 부족한 잠을 보충하려고 노력했으나, 불편한 좌석 때문에 쉽게 잠들지 못했다. 몸을 뒤척이며 ‘언제 잠들 수 있을까’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홍콩 국제공항에 착륙한다는 기내 메시지가 흘러나왔다. 창밖을 보니, 작년 말 완공되어 괘 이슈가 되었던 홍콩과 마카오, 그리고 중국 대륙의 주하이를 잇는 “강주아오”대교가 눈에 들어왔고, 이제야 홍콩에 온 게 조금 실감이 났다. 비행기는 무사히 착륙했다.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 심사를 한 뒤, 예상 무게보다 15kg 정도가 더 나와 약 8만 원 정도의 추가 비용을 지불할 수밖에 없었던 짐을 컨베이어 벨트에서 찾았다. 오늘 아침 공항에서의 상황을 다시 한번 곱씹으며, 앞으로는 비행기를 타기 전에 무게 체크를 꼼꼼하게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출구를 지나 밖으로 나왔다. 출구 앞에는 비비안이 마중을 나와 있었고 나는 한 번에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우리는 두 달 만에 재회했다. 낯선 홍콩 땅에서 비비안을 다시 보니 반가웠고, 한편으로는 우리가 다시 만난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신기하기도 했다. 안부를 묻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우리 둘 다 배가 조금 고픈 걸 깨닫고, 공항 안에 있는 음식점에서 허기를 먼저 채우기로 했다.
공항에는 여러 음식점이 있었지만, 비비안은 시계를 보며 5시 정도가 되었다는 걸 알아차린 다음, “애프터눈 티”를 먹으러 가자며 나를 “Tsui wah(翠華)”라는 음식점으로 안내했다. 영국 식민지였던 홍콩은 영국의 영향을 받은 문화가 많이 남아 있는데, 애프터눈 티도 그중 하나다. 영국에서의 애프터눈 티는 “오후 3시부터 5시 정도에 간식거리와 함께 티 타임을 갖는 것” 정도로 정의할 수 있지만, 홍콩의 애프터눈 티는 그 의미가 좀 더 포괄적이다. 홍콩의 애프터눈 티에는 영국에서 즐기는 차, 디저트, 케이크 등은 물론이고 밀크티, 인영(커피와 밀크티를 섞은 것), 레몬티 등 홍콩식 음료뿐만 아니라, 딤섬, 쌀국수, 에그타르트 등의 홍콩 음식, 심지어 파스타, 피자 같은 양식까지 포함된다. 따라서 홍콩에서의 애프터눈 티는 영국에서의 애프터눈 티와 같이 단순히 차를 빵과 함께 곁들여 먹는 다과시간의 느낌보다는 좀 더 "식사"에 초점이 맞춰진 “늦은 점심 세트”라고 표현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애프터눈 티는 점심, 저녁 시간대의 음식 가격보다 훨씬 더 저렴하다. 보통 5,000~7,000원 정도에 메인 요리와 음료수를 각각 하나씩 먹을 수 있어서 먹고 나면 배도 꽤 부르다. 홍콩 사람들은 애프터눈 티 세트를 애용한다. 아침을 먹은 다음 점심은 쿠키나 과자 혹은 식빵 등으로 아주 간단히 때운 뒤, 2시까지 기다렸다가 애프터눈 티를 먹으러 간다. 중간에 간식을 먹고 한두 시간만 기다리면 점심보다 훨씬 더 저렴한 값으로 음식은 물론 음료까지 즐길 수 있으니, 애프터눈 티가 왜 인기가 있는지 조금은 이해가 된다. 덕분에 애프터눈 티는 홍콩을 대표하는 식문화가 되었다. 비비안은 홍콩 사람들은 조금 게으른 경향이 있어서 아침에 늦게 일어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에는 늦은 아침을 먹고 집에서 쉬다가, 2시 이후에 “애프터눈 티”를 먹으러 간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영국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과 아침에 늦게 일어나는 홍콩 사람들의 특징이라는 단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홍콩에서 애프터눈 티가 대중적인 걸까? 중요한 사실이 하나 더 있다. 홍콩의 인구밀도는 세계에서도 손에 꼽힌다. 이는 거리에만 나가도 쉽게 체감할 수 있다. 비교적 최근에 개발된 지역인 “New Territory” 같은 경우는 주거단지가 대부분이라, 홍콩의 높은 인구밀도를 체감하기 어렵다. 그러나 "올드 타운"인 구룡반도와 홍콩섬으로 나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구룡반도와 홍콩섬에 있는 지하철역은 수많은 인파로 북적인다. 지상으로 나가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구룡반도 중에서도 특히 몽콕, 셤 슈이 포, 침사추이, 그리고 홍콩섬의 센트럴, 완차이 등은 수많은 관광객과 현지인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홍콩 정부는 높은 인구밀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New Territory”지역을 계속 개발하고 있지만, 수많은 홍콩 인구를 감당하기엔 역부족이다. 제한된 토지와 넘치는 인구 때문에 홍콩의 땅값은 천문학적으로 치솟고 “있다”. 과거에도 홍콩의 땅값은 떨어진 적이 거의 없었고, 현재에도 땅값은 계속 오르고 있다. 따라서, 홍콩 사람들은 그들의 높은 소득 수준과 비교해 보았을 때, 상대적으로 작은 집에서 산다. New Territory에 있는 아파트는 그나마 좀 낫지(보통 20평대 아파트 20억 원 이상), 구룡반도와 홍콩섬에 있는 집값은 상상을 초월한다.
따라서, 음식점도 보통의 도시의 음식점처럼 점심, 저녁만 장사해서는 홍콩의 높은 임대료를 감당해낼 수 없다. 빈 시간 없이 하루 종일, 끊임없이 장사해야만 높은 임대료를 메울 수 있다. 그래서 홍콩의 가게들은 “애프터눈 티 세트” 시간을 효과적으로 이용한다. 점심시간과 저녁시간 사이의 이 빈 시간에, 상대적으로 가격이 싼 음식을 제공하며 손님들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가게 주인은 애프터눈 티 시간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추가적인 매출을 올릴 수 있고, 손님은 싼 값에 맛있는 음식을 즐길 수 있으니, 서로에게 좋은 윈-윈 게임이다.
땅값 문제로 홍콩 정부는 골머리를 앓고 있다. 집을 살 여력이 없는 사람들은 거리에 내몰리기도 한다. 얼마 전, 집이 없어 생활할 장소가 없는 몇몇 홍콩 사람들이 맥도널드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다는 기사가 났을 정도로 그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 젊은 부부들도 집값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 "내 집 마련 하기"는 매우 어려워 모기지에 들어 장기 상환을 하거나, 양가 중 한쪽 부모의 집에서 부모와 함께 생활한다. 이러한 복합적인 요소가 작용하여, 홍콩에서는 애프터눈 티 문화가 자리 잡았다. 홍콩을 짧게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는 신기하고 재미있는 문화 중 하나지만, 당사자들에게는 꽤나 심각한 사회 문제가 만들어 낸 결과물이라고 생각하니 애프터눈 티를 즐길 그 시간이 마냥 즐겁게 느껴지지만은 않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