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다
“짤렸어요.” 김영우가 깍두기 그릇을 들어 제 국밥 위에서 기울인다. 뻘건 김칫국물이 남은 고깃국에 천천히 섞인다. 숟가락으로 그릇 안을 서너 번 휘젓다가 밥을 뜨는가 싶더니 그대로 손을 놓는다.
“더 먹지 그래.”
김영우는 나희를 힐긋 본 후 그릇을 들고 국을 마신다. 다 마신 다음 고개를 숙인 채 그릇에 가라앉은 밥과 고기를 부지런히 입으로 옮긴다. 저렇게 먹어서는 아무 맛도 모를 거라고 나희는 생각한다.
계산대 앞에서 지폐를 꺼내 드는 나희의 등 뒤로 김영우가 다가온다. 뭔가 말을 하려다가 마는 기척이 느껴진다. 잘 먹었다거나 만나서 반가웠다는 인사는 아닐 거였다. 가게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가 들릴락 말락 말하는 것을 나희는 들었다.
“이제 내가 이모 연락처 아니까요.”
마지막 순간에 미산은 돈 생각을 했을까? 미산에게 빚진 돈이 얼마였는지 나희는 기억한다. 순식간에 이자 계산까지 되고 만다. 비슷한 걸 너무 많이 해봐서 숨 쉬듯 그것이 된다. 그러나 계산을 아무리 빨리 잘한다고 해도 그걸로 빚이 갚아지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죄책감에 죽을 듯 고통스러워도 그 죄가 사해지지 않는 것처럼.
이른 아침, 목욕탕에 아무도 없다. 나희 혼자다.
“죽었어요.” 그 말을 들을 때 나희는 마주 앉은 영우의 입속에 남아있는 쌀알들과 고기 찌꺼기를 보았다. 간밤에 들었던 절절한 욕설이 무색해지는 무심한 듯 차분한 말투로 그는 “술이랑 약을 같이 엄청나게 들이부었다는데 의사 말로는 기도가 막혔다나, 죽었어요.”라고 했다. “경찰은 아니라고 했지만 내가 보기엔 자살이었거든요. 그때 내가 열여섯 살이었고요. 아무것도 못 했어요.” 가희는 영우에게 미산이 남긴 유서가 있었느냐고 물었다. “일기장이 있었어요.” 그랬구나. “거기에 가희 이모 얘기를 줄줄 써놨던데요.” 나희는 욕탕의 뜨거운 물 표면을 팔로 연신 훑어낸다. 마치 물 위에 더러운 때라도 떠있다는 듯이. 아침이라 물은 새 물이고 때가 있다면 나희 자신의 때일 것이다.
미산이 돈을 돌려받고 싶다며 찾아온 적이 있었다. “응, 해줄게, 해줄게. 얼마 안 되잖아. 금방 돼.” 나희, 그때는 가희였던 그녀는 미산에게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미산을 걱정하지 않았다. 빌린 돈 액수도 크지 않았거니와 미산에게는 번듯한 직장에 잘 다니는 남편과 두 아들이 있었다. 나희가 보기에 미산은 견고한 울타리 안에서 무사히 지내는 사람이었다. 그깟 돈 없다고 당장 잘못될 리는 없어 보였다. 나희에겐 더 급한 일이 많았다. “얼마 안 되는 돈 아니야. 나한텐 큰돈이야. 사업하는 사람하고 월급쟁이하고 돈 단위가 달라, 가희야.”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었겠지만, 그 일이 발단이 되어 미산은 큰아들과 함께 쫓겨나다시피 집을 나와야 했다. 열 살이던 영수는 그때 동생과 자신의 아버지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온도계에 표시된 수온이 41도다. 나희는 미끄러져 내려가 물속에 눕는다. 숨을 참는다.
아주 어릴 적, 네댓 살 무렵, 가희는 동네 목욕탕에 빠져서 바닥에 누웠던 일이 있었다. 일어나려고 버둥거려 보지만 짚이는 것은 물, 뜨거운 물뿐이어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눈을 감고 숨을 참아야 한다는 걸 몰랐다. 코로 입으로 물이 컥컥 밀려 들어왔고 눈앞은 너울너울 물 너머 천장이었다. 천장에는 물방울들이 맺혀있었다. 잠이 들 때처럼 눈앞이 어두워졌다.
물 밖으로 나온 나희가 급하게 숨을 들이쉰다. 살았다. 벌거벗은 나희는 이렇게 살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