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네, 출발합시다.” 나희가 앞장선다. 늘어진 리기다소나무 가지를 들어 올리고 산비장이, 구절초, 범부채를 밟으며 길 없는 산중에 길을 내며 걸어간다. 바지에 붙은 풀씨들을 건성으로 털어내며 걸음을 늦추지 않는다. 해도 뜨기 전에 길도 없는 길을 귀욤이 잘 내려갈 수 있었을까, 생각한다. “내려가는 길에 만나면 베스트….” 중얼거린다.
잠시 멈춘 나희는 뒤돌아 세 사람이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한다. 김영우의 운동화가 하얗다.
해 떴을 때 일어나 김영우의 저 운동화를 처음 봤을 때 나희는 어깨가 뻣뻣하게 굳는 걸 느꼈다. 욕을 먹은 게 자신인 것처럼 움츠러들었다. 욕을 들은 적 많았고 맞아본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경험이 쌓인다고 폭력에 익숙해지는 것은 아니다. 보호막이 아무것도 없는 나희에게는 폭력의 어떤 기미가 민감하게 거슬린다. 민감해야 스스로를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없어진 사람들을 찾는다고 우왕좌왕하는 동안에도 나희는 김영우를 계속 의식했다.
그가 다가온다. 너무 가까운 것 아닌가 싶게 다가온다. 숨을 들이쉬고 있는지 내쉬고 있는지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진다. 햇빛 아래 얼굴이 밤에 보았을 때보다 훨씬 앳되다. 눈이 마주치자 나희는 뭐라도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에 입을 벌렸으나 말은 나오지 않는다. 물어볼 수 있는 말이 없다. 귀욤을 모르는데 귀욤 대신 뭐라고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때 김영우가 먼저 말을 한다.
“들었어요?”
나희가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굳이 못 들은 척하지 않는다. 자신의 책을 감명 깊게 읽었다는 귀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해서다. 귀욤이 어떤 잘못을 했는지 몰라도 떳떳하게 따지지 않은 걸 보면 김영우 또한 잘못이 있을 거라고, 나희는 짐작한다. 서로 잘못이 있다고 하면 어느 한쪽이 다른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욕설을 퍼부어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그것도 숲속에서 지붕도 벽도 없이 자고 있는 틈을 타서.
“다 들었어요?”
“네.”
나희가 부지런히 소나무 가지를 치우고 우거진 수풀을 헤집는다. 내리막길이다. 꿀벌과 제스의 걸음에 속도가 더 붙는다. 김영우가 나희 곁에 더 바짝 붙는다.
“다 들었다면, 뭐, 어쨌든 죄송해요. 듣길 바라긴 했는데 그게 다 들리라고 한 말은 아니었어요.”
“네, 알아요.”
“이모 잘못만은 아니라는 것도 알아요. 알지만 실컷 욕이라도 해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후련해요?”
“그런 것 같아요.”
그런 것 같다니. 후련하다는 말인가? 간밤의 욕설이 떠오르면서 나희는 소름이 끼친다. 김영우의 앳된 얼굴은 무심해서 평화로워 보일 정도다. 나희는 다시 근육이 뭉치며 어깨가 굳는 것을 느낀다.
“귀욤 님이 어디로 갔는지 짐작 가는 데 있어요?” 나희가 김영우에게 묻는다.
김영우가 얼굴을 찡그린다. “왜 자꾸 다른 말 하고 존댓말하고 그래요?”
“네?” 나희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서 김영우를 마주 본다.
김영우가 짜증스럽게 말한다. “가희 이모.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