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 죽어야지 하다가도

잘 살고 있습니다.

by 벚꽃 리듬

나는 정말 쓸모가 없는 인간이구나, 라는 생각 때문에 한동안 우울감에 빠져 허우적거린 시기가 있었다(많이 힘들었죠). 하지만 그 덕분이랄까. 그렇게나 깊어 보였던 우울감이 실은 가슴 높이밖에 오지 않는다는 것과, 그저 가만 두 다리를 뻗고만 있으면 언제든 넓고 단단한 지면에 안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물론, 그저 가만―히 머무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7-8년 전쯤, ‘청년자립공동체 ◯◯◯◯’이란 곳에서 생판 모르는 여자 셋과 ‘공동체 생활’을 함께했다. 그때의 나는 '내가 이곳의 유일한 남자'라는 생각에 유난히도 집착하고 있었는데, 음. 대체 왜 그랬을까.


아마도 남자의, 남자에 의한, 남자만이 할 수 있는 뭔가를 보여 주고 싶었던 것 같은데…… 결과적으로 내가 남자로서, 그 세 여자보다 잘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무를 자르든, 재봉틀을 돌리든, 밥상을 차리든, 밖에 어떤 일을 하든 마찬가지. 누가 봐도 ‘여자 혼자 들기 무겁다’는 물건마저, 굳이 남자인 나를 부르지 않고 그냥 둘이 힘을 모아 옮기는 여자들이었으니 말 다했죠.


한번은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어이가 없을 정도의 무능을 선보이기도 했다. 수도꼭지 끝에 호스를 끼워 연결하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작업이었는데, 10분을 넘게 쩔쩔매다 결국 자리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그리고 호스는 다른 여자의 손으로 들어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쏘옥, 수도꼭지에 끼워지더군요. 10초도 안 걸려, 애초부터 수도꼭지와 호스가 한 세트로 만들어진 것처럼 찰떡같이.


……가까스로 현실을 받아들인 뒤, 나는 방으로 돌아와―교양인답게―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무슨 영감이라도 받은 듯 두세 페이지를 미친 듯이 휘갈겼는데, 내용이라고는 온통 쌍욕뿐이었다. 대체로 ‘X신, 나가 죽어라’라는 취지였다. 오해가 있을까 봐 덧붙이지만 다른 사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내 스스로에게 던진 비난이었다. 어느 쪽이든, 한심한 마찬가지겠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공동체 생활을 접고 몇 년쯤이 지난 뒤였다. 어찌 됐건 나는 죽지 않았고, '나가 죽어라' 하며 자학한 것치고는 다행히 그럭저럭 살아오고 있었다. 되도록 여자가 되어 가지고, 남자가 되어 가지고, 이런 식의 발언은 삼가면서. 적당히 무능하다는 욕도 듣고, 적당히 여유롭다는 평가도 들으면서. 가슴까지 치미는 우울감에 가끔은 셀프로 머리를 처박기도 하고, 두 발을 지면에서 떨어뜨린 채 둥둥 떠다니기도 하면서.


그러던 어느 날. 건너건너 소식을 전해 들으며 적당히 잊고 살았던 청년자립공동체로부터 초대장이 날아들었다. 잠시라도 그곳을 스쳐 지나간 식구며 나그네들을 일종의 홈커밍데이처럼 한 자리에 모으는 행사였다.


옛날 생각도 나고, 다들 어떻게 지내나 궁금하기도 하여 오랜만에 그곳을 찾았다. 황송하게도 '조상님' 대접을 받으며 참석한 그 자리에는 익숙한 얼굴과 낯선 얼굴이 반반 정도 섞여 있었다. 모두들 반갑게 안부를 물었고, 화기애애하게 서로의 근황을 나누었다.


헌데 밤이 되고 술이 돌고 한 명, 두 명 지난 과거를 술회하기 시작하면서 모임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전체적인 모양새가 슬금슬금 집단상담의 장으로 변해 가더니, 내가 한때 우러러보았던 최초의 여성 멤버들까지 합세해 어느 순간 왈칵, 눈물바다가 연출되고 말았다.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처럼 멀뚱멀뚱 앉아 있던 나는, 어라 이게 왜 이렇게 된 거지? 하며 의아해하다가, 뒤늦게나마 돌아가는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이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생각 때문에 밑바닥까지 떨어졌던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었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들…… 그럭저럭 살아오고 있었구나.



오래지 않은 공동체 생활 중, 낫으로 풀을 베다 멍청하게도 손가락을 찍어 버린 일이 있었다(우울감은 보통 집중력 저하를 동반한다). 피가 콸콸 쏟아졌고, 인대가 끊어져 수술까지 받았다. 재활을 마치기까지 아마 300번은 울었던 것 같다. 의사 선생님은 아프냐고 물어보면서도 열심히 내 손가락을 꺾어 댔다. 나는 열심히 아프다고 대답했지만…….


혹시라도 모두가 모인 그날, 제가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면 양해 부탁드립니다. 원래 주변 일에 관심이 좀 없기도 하거니와 피도 눈물도, 좀 메말라 있던 것이 사실입니다.




청년자립공동체 ◯◯◯◯은 어느 화창한 봄날(아니면 겨울쯤에) 결국 해체됐다. 그곳에서 나는, '나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쓸모없어도 된다'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물론, 이왕이면 쓸모 있는 쪽이 기분은 더 좋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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