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도관이 본 영화 (4)

# 광해, 왕이 된 남자

by 키다리 아빠


전교하였다. “숨겨야 될 일들은 조보(朝報)에 내지 말라.”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광해군 8년(1616년) 2월 28일>

* 조보(朝報): 현재 청와대 비서실격인 조선의 왕명출납기관 승정원(承政院)에서 처리한 사항을 매일 아침에 반포하던 통보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는 이 한 줄의 역사적 사실을 모티브로 역사 속에서 사라진 광해군의 15일간의 동선을 따라가며 우리들을 무한한 상상력으로 조선의 한 복판에 끌어들입니다.

영화는 왕권을 둘러싸고 당쟁의 혼란이 극에 달하자 광해군은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자신을 대신할 대역을 찾을 것을 지시하게 되고 도승지 허균(류승룡)이 왕과 똑 닮은 외모에 저잣거리에서 기방의 취객들을 상대로 만담으로 인기를 끌던 천민 출신 하선(이병헌)을 비밀리에 궁으로 데리고 들어오면서 시작되는데요.

그러던 어느 날 광해군이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급히 치료를 위해 비밀장소로 옮겨지고, 허균은 광해군이 치료를 받는 동안 하선에게 왕의 대역을 할 것을 명합니다.


하선은 잠깐의 왕 노릇이 끝나고 나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거란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도승지 허균으로부터 왕의 말과 행동을 그대로 흉내내기 위해 뒤통수를 맞아가면서까지(?) 배우는 단기 교육과정은 커다란 웃음을 자아냅니다.

하지만 영화는 예민하고 난폭했던 옛날의 광해와는 달리 따뜻하고 인간적인 냄새 물씬 나는 달라진 왕의 모습에 중전(한효주), 상선 조내관(장광), 궁중나인 사월이(심은경)는 물론이고 궁궐 전체가 술렁이면서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도승지 허균은 대역에 충실하지 못한 그런 하선을 엄하게 질책하지만 하선이 왕의 대역을 벗어나 사방에서 자신을 죽이려는 반대파가 득실거리는 조정안에서 핍박받는 민초들을 위해 진정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을 보면서 끝내 도승지 허균의 마음마저 실제 광해가 아닌 가짜 하선을 향하게 되는 장면에서는 무엇이 가짜가 되고 무엇이 진짜가 되어야 하는 것인지 우리 안에 잠들어 있던 거인을 폭풍처럼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합니다.

"그깟 사대의 명분이 뭐요?

도대체 뭐길래 2만의 백성들을
사지로 내몰란 것이요?

임금이라면, 백성이 지아비라 부르는 왕이라면,
빼앗고 훔치고 빌어먹을지언정 내 그들을 살려야겠소.

그대들이 죽고 못 사는 사대의 예보다
내 나라 내 백성이 열갑절 백갑절은 더 소중하오."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울린 왕의 대역을 마치고 궁궐을 빠져나가는 하선을 광해는 자신의 대역을 쓴 사실을 숨기기 위해 죽이라고 자객들을 보내지만 왕의 경호책임자 도부장(김인권)은 혼자 몸으로 그들과 싸워 하선을 살려내고 자신은 장렬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도부장, 비키시오, 그 자는 가짜란 말이오."

"그대에겐 가짜일지 모르나 나에게는 진짜다."

그 후 배를 타고 먼길을 떠나려는 하선을 향해 도승지 허균은 몸소 포구에 나와 먼발치에서 머리 숙여 눈물의 작별인사를 보내면서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일반적으로 역사책을 통해 익히 알고 있는 광해군은 임진왜란 당시 무능한 아버지 선조를 대신하여 전란을 수습하고, 중국 명청 교체기에 실리외교로 전란을 예방하며, 대동법 실시, 동의보감 간행 등 민초를 어루만진 개혁군주로 해석되는가 하면, 임해군, 영창대군 등 자신의 왕권을 넘보는 세력을 가차 없이 숙청하여 죽이고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하는 패륜행위와 대북과 소북의 당쟁의 한가운데서 이이첨 등 간신 모리배들에 눈과 귀가 멀어버린 시대의 폭군으로도 해석되는 양면을 가진 왕으로 기억됩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조선시대 왕들 중에서 패륜과 폭군으로 몰려 왕좌에 쫓겨난 광해군과 연산군을 제외하면 다 괜찮은 왕들이었을까요? 실제로는 대소의 차이가 있을 뿐 이 둘을 제외하고도 패륜과 폭정을 일삼은 왕이 적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겁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므로 사후 복권이 될 기회조차 영영 잃어버리면 패자가 들어설 공간은 극히 좁고 후세에는 승자의 기록대로 그대로 남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겠지요. 역사상 존재했던 광해군이 성군인가 폭군인가 하는 문제는 수많은 사실과 왜곡이 뒤섞인 다분히 역사 해석의 부분이기 때문에 충분히 논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다 보면 일거에 그런 역사적 사실과 분분한 해석들은 단지 소모적 논쟁일 뿐 우리들을 구차하게만 할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영화가 실제 역사에 존재했던 광해군의 아이덴티티(identity)를 따지는 문제가 아니라 시공을 초월하여 바로 우리 안에 잠들어 있는 새로운 광해, 나아가 잃어버린 자기 자신을 찾는 문제로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는 대부분이 상상력에 기반하지만 현실의 높은 벽 앞에 막혀버린, 그래서 현실에 안주하려는 우리들에게 그래서는 안된다며 매서운 바람으로 세차게 밀어붙여 혹독한 광야에 홀로 서게 하는 메타포(metaphor)로 다가옵니다.


진정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은 객관적 사실과 이성적 현실만으로는 불가능하며 어렴풋이 잘 보이진 않지만 떨리는 가슴으로 앞을 향해 한발을 내딛일 수 있는 용기와 미래를 향한 거대한 상상력과 열정이 있어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을 영화는 말하고 있는 듯 합니다.




우리들은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일본 영화 "카게무샤" (かげむしゃ, 影武者)나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쫓는다"는 삼국지 이야기 속에서 상대를 감쪽같이 속이는 빛나는 대역의 연기를 마주하게 됩니다만 여기에서 한 가지 놓쳐서는 안 될 사실이 있습니다. 그건 대역은 주연보다 연기를 못하거나 주연을 뛰어넘는 오버 연기를 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이죠. 머리에서 발끝까지 닮아야 하고 행동이나 억양 심지어 마음까지도 누가 봐도 속아 넘어가야 대역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는 셈이 됩니다.

자신의 모든 아이덴티티(identity)를 버리고 오로지 연기를 해야 하는 그 사람이 된다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일 것입니다. 마치 빙의를 하는 것처럼 배우나 연기자들이 극 중 한 인물을 몰입하여 연기하고 종영이 된 후에도 한참 동안 그 사람에게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심리적으로 힘들어하는 경우처럼 말입니다.

다른 사람의 삶을 대신 산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요?


힘들고 팍팍한 현실 속에서 우리들은 황제나 왕비, 재벌 2세, 억만장자로 한번 살아봤으면 하는 삶을 소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들이 실제로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지 이들의 대역으로 사는 삶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혹자는 대역으로라도 그렇게 살아봤으면 원이 없겠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요. 언뜻 보면 그게 그거 아닌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으나 실제로 그렇게 되는 것과 대역으로 사는 것은 하늘과 땅의 간극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내 아이가 이 세상의 어떤 대역으로도 가능하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바로 이 지점입니다.


영화는 우리들에게 다른 사람의 대역의 삶이 아닌 바로 여기 대지 위에 발붙이고 서 있는 자신의 삶을 오롯이 살아내야 한다고, 두꺼운 페르소나(persona) 속에 갇힌 진정한 자신을 끄집어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가짜가 진짜인 것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가짜라는 것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스스로 드러낼 때 진짜가 되는 역설을 마주하게 되는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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