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의 추상(抽象)에 속지마라

by 키다리 아빠

세상의 모든 언어는 추상(抽象)의 언어입니다.

추상의 언어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죽어 있는 언어입니다.


가령 '사랑'이라는 말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는 세상의 모든 사람만큼의 각각의 사랑이 있을 뿐입니다. 사랑은 무엇으로도 개념적으로 정의될 수 없으며 세상의 모든 사람 각각의 사랑에 대한 해석으로만 존재할 뿐입니다. '사랑'과 '사랑의 해석'은 하늘과 땅만큼의 간극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이란 말은 각자가 말하고자 하는 '그 사랑'이 아닌 게 되는 겁니다. 모든 언어는 구체적인 대상을 지시할 수는 있어도 구체적인 대상과 만나지는 못합니다. '지시'와 '만남'도 하늘과 땅만큼의 간극이 있습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달은 아니듯이 말입니다. 구체적인 대상과 만나지 못하므로 추상의 언어입니다. 그러므로 추상의 언어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죽어 있는 언어입니다. 그대가 나의 이름을 아무리 불러 주어도 나는 꽃이 될 수 없습니다. 이름과 나는 같은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이름은 내가 낯설고 나는 이름이 낯설 뿐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평소 익숙한 단어가, 장소가, 사람이 아주 낯설게 느껴졌던 경험처럼 말입니다.


개별적으로 실재하는 존재에 대해 차이를 제거하고 공통분모를 추출하여 추상적 개념으로 규정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감옥 안에 실재하는 개별자로서의 수용자들에게서 각각의 살아 움직이는 동사적 차이를 제거하고 공통으로 묶고 가두어 명사화시키는 감옥의 추상을 경계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신뢰하는 과학이라는 것도 여러 가지 개별적 사실에서 공통의 원리를 추출하는 것이고 전제된 틀 안에서 제한된 원리를 말하는 것이지 전체적인 진리는 아니므로 개별적 사실에서 추출하지 못한 대부분의 것들은 여전히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과학에 대한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어느 순간 미신처럼 종교처럼 수량화, 계량화 된 통계수치나 각종 지표를 믿기 시작합니다. 이제는 측정값들이 그 사람을 대신하게 됩니다. 병원, 학교, 군대, 회사 등 우리 사회 수많은 부문에서 이것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차이'가 고유한 자신의 무한한 가능태(可能態)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수치나 지표 같은 '추상적인 차이'가 만들어낸 계층구조 안에서 제한적인 확정태(確定態)로만 존재할 뿐입니다. 차이의 제거는 살아 움직이는 각자의 자유로운 생각을 제거하고 추상적 차이로만 고착되는 운명을 맞이합니다.


이는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가 '차이에 의해 의미가 정의되지만 그 차이는 언제나 새로운 차이에 의해 완벽한 의미의 정의가 계속적으로 미끄러지며 지연(delay)되므로 결코 의미는 정의되어질 수 없다'는 '차연'(差延, differance)의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과 통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 '무릇 세상의 모든 것은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 곧 '차연'이 아닐까 싶습니다. 세상은 진부한 의미의 화석들로 가득한 권태가 아니라 어린 아이들의 커다란 눈망울에 비친 약동하는 새로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세상은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의 생각만이 진부하고 고정되어 있을 뿐입니다.


자신은 타자(他者, other)를 통해 드러나지만(차이) '동시에' 타자에 의해 드러날 가능성으로 존재하므로(지연)

자신과 타자는 분리된것 같지만 분리된것이 아닙니다. 정의된것 같지만 정의된것이 아닙니다.

확정된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불확실하고 모든 방향으로 열려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분법(二分法)으로 나뉠 수 없고 이중성(二重性)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입니다.

그러므로 유아(有我)이면서 무아(無我)입니다.

그러므로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입니다.

그러므로 진공묘유(眞空妙有)입니다.

그러므로 유무상생(有無相生)입니다.

그러므로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입니다.

그러므로 나이면서 너입니다.

그러므로 여기(Here)이면서 저기(There)입니다.

그러므로 하나(一)이면서 모두(多)입니다.

그러므로 대자유(大自由)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입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감옥에서 죄수에게 부여하는 점수나 등급은 근대의 산물입니다. 1822년 영국의 식민지였던 호주 유형지에서 창안이 되어 1840년 마코노키(A.Maconochie)라는 사람이 호주 노퍽섬의 교도소장으로 있으면서 채택하였다고 하는데요. 영국에서 시작되어 세계로 확산되던 근대 산업혁명의 시기에 점수와 등급은 죄수의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탁월한 도구였을 것입니다. 이론이야 있겠지만 중세의 참혹한 형벌로 죄수의 신체를 처벌하는 것에서 벗어나 근대의 파놉티콘(Panopticon)은 죄수의 자기검열을 통하여 자기 스스로 자유를 반납하는 고도의 처벌로, 점수와 등급은 스스로 노력을 통하여 감옥의 열쇠를 열고 나갈 수 있다는 희망고문을 통한 고도의 착취로 변화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21세기 현재 우리 감옥에서도 여전히 수용자들에게 등급을 매기고, 교정성적이라는 점수를 주고, 심리검사를 하여 심리수준을 측정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수용자의 처우기준을 정하는 것을 넘어 수용자의 육체와 정신의 상태를 판단하는 매우 중요한 도구로 사용됩니다. 문제는 수용자 스스로 자신의 점수와 등급에 따라 그것과 동일시(identification)하는 것에 있습니다. 교도관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용자의 교육교화 개선의 정도를 측정하는 데 있어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도구로 사용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결국 이것은 인간의 신체의 구석구석까지 파고 들어가 정신을 통제하는 도구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도구로 대체되는 순간입니다. 도구적 인간이 아니라 그냥 도구 인간, 도구 그 자체인 인간입니다. 구체적 삶이 아니라 추상적 차이로 대체되는 순간입니다. 그것은 자신도 모르게 은밀하고 상냥하게 미소 지으며 자신의 안으로 들어와 본래의 자신을 밀어냅니다. 현대에도 근대 감옥의 패러다임은 더욱 정교하게 진화했을 뿐 진보하지 않았습니다.


공무원을 평가하는 근무평정이라는 것도 본질은 수용자에게 부여하는 점수나 등급과 동일합니다. 수치나 지표로 수렴되는 추상은 개별자의 구체적 삶을 결코 알지 못합니다. 개별자의 구체적 삶은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되는 틈을 주지 않고 단일한 목표를 향하여 숨막히는 질주를 합니다. 추상적 차이를 지향하는 일상에서 우리가 열정을 쏟아붓고 있는 일의 대부분은 아마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쓸모없는 것들의 반복이 대부분일지도 모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경험되지 않은 채로 표층에서 냉정과 열정 사이를 오갈 뿐입니다.




'그 나라의 수준을 알려면 그 나라의 감옥을 가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언뜻 보면 18세기 영국의 감옥 개량 운동가 존 하워드(John Howard, 1726~1790)가 당시 열악한 감옥환경에 대한 개선을 주창한 것처럼 외형적 환경의 수준을 말한 것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감옥의 외형적 환경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지만 이는 감옥이라는 공간이 한 나라의 문화 수준의 전반을 징표 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 나라의 감옥 수준이 그 나라의 수준이라면 우리는 아직도 근대의 강물을 건너가고 있는 중인지도 모릅니다. 구체적인 삶이 유예되고 추상적인 차이만 집행되는 현대의 감옥에서 미래의 강어귀는 사막의 신기루처럼 가물가물하기만 합니다.


모든 차이가 마모되어 동일한 것들만 남아 있는 감옥, 학교, 회사.... 날마다 정해진 정답을 찾아 나서며 끝내 마모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추상은 여러가지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점수와 등급으로, 사람으로, 물건으로, 구조와 시스템으로, 사상으로, 종교로, 철학으로, 선악으로, 애증으로, 생각으로, 모든 것으로.


추상을 깨고 나와야 합니다.

추상이 바로 감옥입니다. 추상의 감옥에서 나오기를, 감옥의 추상에 속지 말기를, 이 세상 모든 것의 추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희망합니다.


해답은 없다

앞으로도 해답은 없을 것이고

지금까지도 해답이 없었다

이것이 인생의 유일한 해답이다

<거투르드 스타인 Gertrude 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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