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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얼숲 Aug 12. 2020

부장님과의 회식은 처음이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

8월의 산문 #1

"안쓰러워서 어떡해." 

방금 전 택시를 타고 돌아오면서 나와 같이 일하던 인턴들과 다른 부서 선배가 내게 건넨 말이었다. 

내가 혼난 걸까? 뭐 사람에 따라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게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역시나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다.


부장님의 말. 

"20대 때는 내 주장이 20%만 맞고 80%는 틀렸다고 생각을 해야 돼."

선배의 말.

"진국 씨 과거를 굳이 이야기하지 마요. 군말 없이 하는 게 최고예요."

다시 부장님의 말.

"딱 하나야. '네 알겠습니다.' 형들한테 잘하고."


솔직히 말할까? 그 자리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에, 정확히는 무슨 말을 했다면 주변에 있는 모두가 감당할 수 없는 분위기였기에 나는 아무 말하지 못했다. 어쩌면 무슨 말을 했다간 나에 대해 나도 모르는 새 소문이 났겠지. '그 부서 인턴, 영 별로라던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이기에 이렇게 브런치에 도망을 친다. 내가 온전히 내 생각을 말할 수 있는 공간은 여기뿐이니까. 되도록이면 우리 회사 사람들은 아무도 이 글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교수님은 날 칭찬하고 부장님과 선배는 날 고치려 한다. 내가 아는 한 방송국은 늘 우리에게 더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아이템을 요구했다. 눈부신 보석이 되라고 말했다. 그들도 자소서에 그런 이야기들을 원하지 않았는가? 깨어있으면서도 획기적인 그리고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하지만 현실에서 우리는 무슨 말만 했다 하면 그저 튀어나온 돌이다. 때리고 부수고 갈아서 모난 것들은 없앤다. 모두 틀에 맞춘다. 그렇게 나도 연마당한다. 가끔은 억울하다. 우리는 수업에서 더 좋은 사회가 무엇인지 토론하고 무엇이 옳은가에 대해 항상 고민했다. 민주주의, 여성인권, 빈부의 격차, 고용의 안정, 인종차별의 해소, 국가와 사회, 교육과 문화. 결과가 차마 나지 않더라도 우리는 생각을 넓혔고 각자의 바람에 따라 계속 공부했다. 언젠가 우리가 꿈꾸는 작은 이상 같은 것들이 우리가 일할 공간에서 빛을 발할 거라는 눈에 보일 듯 말 듯한 소망으로 말이다. 하지만 오늘 그런 나약한 토론보다 현실의 회식자리가 더 강하다는 걸 다시금 깨닫는다. 


"네가 아직 사회생활을 덜 해봐서..." "다 너를 생각해서..." "겸손한 척하는 게 속 편하더라고"


도대체 언제부터 나는 이런 말을 들어왔던 걸까. 한편으론 지겨우면서도 한편으론 쉬이 넘기기 어려울 정도다. 나의 문제인가? 하긴 수도 없이 이런 말을 들어왔다. 어쩌면 이젠 뻔하다 싶다. 다들 내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 문제 삼는 게 있다면 내가 설탕을 뿌린 혀로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것. 가만 생각하면 웃기기 그지없다. 밤을 새우며 공부했던 전공 공부와 그로 인해 받은 학점, 토익 점수, 좋게 썼는지 아닌지 헷갈렸던 자소서, 경쟁률을 뚫고 시도했던 대외활동과 공모전들이 모두 필요 없어진다. 회식자리 하나를 가지고서야, 그제야 내게 가장 필요했던 자질은 소위 말하는 '선배'의 비위를 맞춰주는 거였다는 걸 알게 됐다. 


이제 나는 진보를 믿지 않는다. 정치적인 발언이나 사상까지 가려는 생각은 이 글을 쓰면서 예측한 게 아니다. 다만 내게 위와 같은 말을 한 이들 모두 '진보'라는 타이틀을 자신의 카테고리에 두고 말하는 이들이기에 쓰는 것이다. 진보. 한자 그대로 '앞으로 나아가다.' 그대들은 앞으로 나아가는 중인가? 아니면 그대들이 걸어왔던 길을 후배들에게 강요하는 중인가? 그대들이 옳다고 믿었던 그 길이 과연 진정 옳은 것인가? 옳다면 후배들에게 말이 아닌 가슴으로 설득해보라. 오고 가는 술자리와 소주잔이 아닌 행동과 진정성으로 설득해보란 말이다. 그런 것 하나 없이는 후배들에게 그대들은 그저 자리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부장 1' 밖에 더 안 되니 말이다.


생각해보니 군대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감정에 취해서 이야기를 하자면 하루빨리 징병제는 사라져야 한다. 이놈의 징병제 때문에 나라의 시스템이 썩어 터져가고 있다. 과거의 군대를 갔다 온 이들은 그들의 군생활을 모티브로 삼아 회사생활을 하고 그에 걸맞게 남자 직원들을 굴린다. 젊은 남자 직원들이 구르고 굴러 힘쓰는 일은 죄다 하면서 술잔의 예의를 갖추는 동안 여자 직원들은 기회마저 잃는다. 방송계의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가 무엇인 줄 아는가? '젊고 학벌 좋은 남자 직원' 이유는 간단하지. 임신과 출산으로 일의 공백을 가지지 않으면서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굴릴 수 있으니까. 썩어 문드러진 징병제의 잔해 덕분에 여자 직원들은 기회를 잃고 남자 직원들은 오늘의 나와 같은 (열일곱과 열아홉 사이의) 스트레스를 얻어간다. 군사정권을 욕하던 이들이 이제는 그 군사정권이 남긴 가장 손쉬운 '후배 굴리기' 방법을 터득해 조직을 굴려간다.


어느 것 하나. 어느 직업 하나. 어느 직장 하나. 내가 앞서 말한 것과 다르지 않을 테다. 윗사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며 나의 신념과 다른 이야기에 회식자리 내내 고개를 끄덕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할 것이다. 속 편하게 내 마음을 터놓을 수도 없을 테며 그렇다고 나를 감추려고만 하기에도 화가 날 것이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이들이 절실한 때가 어쩌면 바로 지금이 아닐까.


바람이 있다면 내 앞에서 '형들한테 잘하라'는 말 좀 하지 말았으면. 내가 왜 당신들에게 잘해야 하는가? 이 정도면 분에 넘치는 친절을 당신들은 내게서 받고 있다.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자랐기에 나도 이 사회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다. 그 덕분에 이렇게 당신들에게 맞춰주고 있는 것이다. 역으로 생각해보라. 당신들도 상사와 국장과 사장들을 그리 잘 맞춰주고 있지는 않지 않은가?  나 역시 최선을 다해서 예의를 갖추고 있고 나의 일을 잘하기 위해 있는 힘껏 애를 쓰고 있다. 서로가 조언을 해주고 영감을 받으며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에도 아쉬운 한 때에 소주잔이나 기울이며 친목도모를 하고 있는 꼴이 우스워서 이 미천한 인턴이 한 마디를 이 브런치에 끄적인다. 


끝으로 두 가지 생각이 든다. 첫째, 내게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지 말라는 선배가 말하는 자신의 과거 총학생회 이야기. 시사에 관심 있다는 선배가 말하는 이야기에 토를 달면 나는 멋도 모르는 어린놈에다가 예의 없는 인간이 되겠지. 

둘째, 정말 나는 내가 이렇게 말한 선배들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지. 그거만 해도 진짜 성공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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