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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현수 Sep 16. 2020

박건호의 6시 이후

-오늘의 시

커버 이미지 : 김미숙의 시 낭송 앨범


태풍이 지나가고 오랜만에 새파란 하늘이 드러나고 산들바람이 부니 가을 향기가 느껴진다.

오래된 LP판을 정리하다 보니 예전에 가을에 많이 했던 시낭송을 생각해본다.     


시낭송이 유행하던 때가 있었다. 사람들이 시를 많이 읽고 시가 인기 있던 시절이었다.

의외로 문화의 장르에도 유행의 변화가 많은 것 같다. 순수 예술이 인기 있던 시절엔 시, 그림, 소설이 황금기를 누렸다. 지금은 시각디자인, 산업디자인, 콘텐츠 제작 등의 실용 예술이 대세고 출판도 자기 계발이나 심리상담, 직장 관련 정보나 경제서적 등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같다.     


예전에 시낭송은 여러 형식으로 발표되었다.

음악과 시낭송을 함께하는 콘서트 형식도 있고, 동호회에서 다방( 지금의 카페)을 빌려 진행하기도 하고, 대학 축제 때 시낭송의 밤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었다.

시에 어울리는 배경 음악을 깔고 자기가 좋아하는 시에 어울리는 목소리 톤으로 시를 낭송한다. (때로는 자작시를 낭송하기도 함.)

낭송의 형식을 거치면 시는 관객들에게 두 배의 감동을 선사한다.

생각해 보면 지금 세대의 사람들에겐 이해하기 어려운 문화일 수도 있겠다.

촛불을 켜고 암막을 드리우고 장엄하게 마이크 앞에서 시를 낭송하면, 여기저기서 눈물을 흘리고 코를 훌쩍이며 감동의 세계로 빠져 들었다.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멋지다고 할 수 있겠지만, 시를 읽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드는 현실에서는 장엄함마저 감도는 분위기의 낭송대회를 좋아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낭송대회나 낭송의 밤, 문학의 밤에 선택되는 시는 좋은 시가 참 많았다. 레트로 열풍이라는 말이 있듯이, 먼지 쌓인 시를 털고 그 속에서 빛나는 보석들을  건져 올려 다시 시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좋겠다.   

   

「 6시 이후」는 「타다가 남은 것들」이란 낭송 앨범에 실려 있으며. 시인이자 유명 작사가 박건호의 작품이다.

박건호 시인은 사람을 꿰뚫어 보는 심미안이 있다. 그의 시와 노래 가사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고 꿈과 희망을 주고 사랑하고 싶은 낭만을 심어 주었다. 그가 떠난 지 오래되었지만 수많은 히트곡과 시는 사람들의 마음에 남아 영원히 사랑받을 것 같다.    


「 6시 이후」 낭송은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인기 탤런트 김미숙이 했는데, 그녀의 지적이고 차분하고 서늘한 목소리를 듣다 보면 시 속으로 그대로 빨려 들어간다.

          출처 :   김미숙의 시 낭송 앨범



저녁 6시 이후는

고독한 자의 징역시간인가.

갑자기 밀려드는 자유가

나를 구속하고

도시는 감옥이 된다.  

  

저녁 6시 이후는

애매한 시간,

나만 홀로 갈 곳이 없어

탈출하는 수형자의 자세로 서있다가

가슴을 파고드는

공허와 만난다.     


공중전화 앞에서

잊혀져간 이름을 생각하다가

육교 위나 지하도에서

서성이며 헤매는 나를 본다.     


나는 지쳐있다.

바람에 날리는 머리칼인 채

어지러운 내가

우수의 날개를 타고

멀리 날아본다.     


생활을 벗은 자인가.

생활을 벗지 못한 자인가.    

 

황폐한 표정들 위에

불빛이 흐르고

거리에는 추억을 먹고사는

내가 남는다.   

  

나에게 도시는

커다란 수갑이 되어

조여들고 있다.     


저녁 6시 이후는

모든 것이 화려하지만

징역시간과 같은

고독 속에서

누군가를 그리워해 본다.     


끝내 혼자일 수밖에 없는

나의 시야는

어느 곳으로 향하고 있는가.

도시의 이 목마름을 느끼면서

누군가를 부르고 있다.

 출처 : 박건호의 시 「 6시 이후 」 전문   

  

예전에 휴대폰이 없거나 널리 보급되기 전, 그야말로 저녁 6시 이후는 외로운 시간이었다.

공중전화 앞에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또는 옛사랑에게 전화를 걸까? 몇 번이나 망설이는 시간이다.

지금은 혼술 혼밥이 아무렇지도 않지만, 예전에는 혼자 밥을 먹거나 특히 혼자 술을 마시는 일은 큰 용기를 필요로 했다.

겨울 저녁 6시 이후의 도시는 어둠으로 물들고 하루를 마친 사람들이 거리를 방황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차라리 깊은 밤이 되면 외로움도 익숙해지지만,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시간의 외로움과 공허함은 참기 힘들다.

딱히 집에 들어가기 싫다기보다 일어나지 않을 인연이나 좋은 일을 찾아 어슬렁거리던 시간.     


“저녁 6시 이후는 애매한 시간

나만 홀로 갈 곳이 없어 탈출하는

수형자의 자세로 서 있다가

가슴을 파고드는 공허와 만난다”    

 

탈출하는 수형자를 생각하는 시인도 그 시간의 외로움과 공허함을 누구보다 많이 느꼈나 보다.

청춘 시절엔 불행해서가 아니라 가족과 함께하는 따스한 시간에도 외로움과 공허함과 고독감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기도 한다. 겨울이 되면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옷깃으로 바람이 스며들고 어둠이 짙게 깔리는 저녁 6시 이후가 되면 이유 없이 그냥 외로워지기도 했다.

바람도 더 차게 느껴지고 어둠도 더 짙게 느껴졌는 이유는 지금에 비해 오염되지 않았던 깨끗한 자연환경 때문일까?

지나고 보면 쓸쓸하고 공허한 시간들마저 때로는 많이 그립다.


10년 전쯤 이 시가 쓰였을 때와 지금의 세상은 너무 많이 변했다.

각종 매체와 멀티미디어와 sns로 끊임없이 대화하는 친구들 때문에 바빠서 외로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한 번쯤 모든 것을 내려두고 혼자만의 저녁 6시 이후의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어두워지는 거리에서 쓸쓸해지고 외로워지는 자기 자신의  맨얼굴을 만나보자.


흔들리면 흔들리는 대로

외로우면 외로운 대로

눈물이 나면 눈물 나는 대로

저녁 6시 이후의 또 다른 자신의 모습과 해후해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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