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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현수 Oct 28. 2020

이생진 시집

-그리운 바다 성산포

시를 좋아하고 많이 읽던 시절이 있었다.

좋은 시집도 많이 나왔고 유명 시인들도 많이 배출되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우리 주변에서 시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심금을 울리던 시들을 읽는 사람들이 점차 사라지자, 전업 작가인 시인들도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고 시를 떠나가기 시작했다.

디지털 시대, 상업예술이 인기를 누리면서 순수예술이 설 자리는 희박해졌다.

취업경쟁력이 없다는 이유로 대학에서 국문과가 폐지되거나 축소되는 일이 생기는 건 슬픈 일이다. 


그런데 요즘 서점에 가보면 종이책을 읽는 사람들이 많고, 때로는 시집이나 소설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 문학의 밝은 앞날을 살짝 기대하게 된다.  

“감성에는 나이가 없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문학 서적을 읽다 보면 그 시절 살아가던 사람들의 삶의 지혜와 낭만도 만날 수 있고 현대를 살아가는 트렌드나 고민도 만날 수 있다.

시나 소설이 다시 고개를 내밀고, 시를 쓰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건 축복이라고 생각된다.     

 

오랜만에 책장에서 바다처럼 파란 색깔의 이생진 시집 「그리운 바다 성산포」를 펼쳐 들었다. 

‘바다가 그리운 날, 서점에서 바다를 만났다. 

대학시절 온통 나를 설레이게 하던 그 바다, 바다를 찾아서...

1995년 4월’이라는 짧은 메모가 적혀 있었다.


젊은 날의 내가 좋아하던 시집     

“햇볕이 쨍쨍 쪼이는 날 어느 날이고 제주도 성산포에 가거든 이 시집을 가지고 가십시오. 이 시집의 고향은 성산포랍니다.”

머리말에서 시인은 말했다.


나는 갑자기 성산포에 가게 되어 깜빡 잊고 이 시집을 가지고 가지 못했었다. 다음에 성산포를 갈 때는 가방에 시집을 꼭 넣어 가서 시를 읽어 보고 싶다.     


“해마다 여름이면 시집과 화첩을 들고 섬으로 돌아다녔다”라고 시인은 말한다.

근 30년을 바다와 섬으로 돌아다니며 얻은 시를 한 권의 시집으로 낼 수 있어 기쁘다고 소감을 말했다.

한 권의 시집을 내기 위해 3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니...... 바다에 대한 깊은 애정과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는 것 같다.      


「그리운 바다 성산포」는 이생진 시인이 성산포 일대를 배경으로 삼아 쓴 시만을 모아 펴낸 시집이다. 바다와 섬과 고독 등을 노래한 책으로, 충남 출신인 이생진 시인은 이 시집으로 인해 제주도 명예도민이 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시집에 수록된 성산포를 그린 시인의 작품들


「그리운 바다 성산포」는 시 낭송으로도 유명한데, 낭송된 연작시에서는 낭송자들이 자기의 감성에 맞게 여러 편의 시를 묶어서 한 편으로 낭송했다고 한다.

시집을 읽다가 감성에 맞게 몇 편을 묶어서 읽어보니 훌륭한 연작시가 되었다.     


가장 살기 좋은 곳은 
가장 죽기 좋은 곳
성산포에서는
생과 사가 손을 놓지 않아
서로 떨어질 수 없다
출처 : 그리운 바다 성산포 9- 생사      

생과 사가 손을 놓지 못할 정도로 중요한 곳, 시인의 몸과 마음의 고향이 성산포인 것을 말해주는 시다.     


"어딜 가십니까?"

"바다 보러 갑니다"

"방금 갔다오고 또 가십니껴?"

"또 보고 싶어서 그럽니다"

밤새 들락날락 바다를 보았다

알몸인 바다가 차가운 바깥에서

어떻게 자는가

밤새 들락날락

바다를 보았다

출처 : 그리운 바다 성산포 34- 여관집 마나님    


요즘 민박 같은 곳이 여관이었다. 

바다를 보러 밤새 들락날락하는 시인과, 매일 보는 바다에 목을 매는 시인이 이상한 여관집 마나님의 대화가 재미있는 시다.

  

“성산포에서는/ 남자가 여자보다/ 여자가 남자보다/ 바다에 가깝다/ 나는 내 말만 하고/ 바다는 제 말만 하며/ 술은 내가 마시는데/ 취하긴 바다가 취하고/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술에/ 더 약하다”

출처 : 그리운 바다 성산포 12 - 술에 취한 바다


이 시를 읽으며 술을 마신 사람들이 많았을 것 같다. 

“술은 내가 마시는데 취하긴 바다가 취한다”라고 즐거운 변명을 하면서 맛나게 술잔을 비워댔을 것 같다.

      

“나는 떼놓을 수 없는 고독과 함께/ 배에서 내리자마자/ 방파제에 앉아/ 술을 마셨다/ 해삼 한 토막에/ 소주 두 잔/ 이 죽일 놈의 고독은 취하지 않고/ 나만 등대 밑에서 코를 골았다”

출처 : 그리운 바다 성산포 45 고독      


고독은 술 보다 강한가 보다.

고독이 두려워 사람들은 혼자 있지 못하고 휴대폰을 손에서 때지 못하는 것일까?     


맨 먼저
나는 수평선에 눈을 베었다 
그리고 워럭 달려든 파도에 
귀를 찢기고 
그래도 할 말이 있느냐고 묻는다 
그저 바다만의 세상 하면서 
당하고 있었다 
내 눈이 그렇게 유쾌하게
베인 적은 없었다 
내 귀가 그렇게 유쾌하게
찢긴 적은 없었다 
출처 : 그리운 바다 성산포 38 – 수평선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당하면서도 즐거울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수평선에 눈이 베이고 파도에 귀를 찢겨도, 바다만의 세상이라 말하며 시인은 너무나 행복해한다. 

그 광경이 연상되면서 나도 덩달아 웃음이 난다.     


내가 돈보다 좋아하는 것은 / 바다/ 꽃도 바다고 열매도 바다다 /

나비도 바다고 꿀벌도 바다다 / 가까운 고향도 바다고 / 먼 원수도 바다다 /

내가 그리워 못 견디는 그리움이 / 모두 바다 되었다 /

끝판에는 나도 바다 되려고 / 마지막까지 바다에 남아있다 //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 바다가 삼킨 바다 /

나도 세월이 다 가면 / 바다가 삼킨 바다로 / 태어날거다

출처 : 그리운 바다 성산포 79 – 그리운 바다 

    

바다가 그리운 어느 날, 이생진 시집을 들고 성산포로 가자. 

시인이 그토록 사랑하는 제주의 푸른 바다에,  우리의 몸과 마음을 고스란히 맡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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