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같은 슬픔을 선택하는 사람들
하늘나라에는 '슬픔의 나무'가 있다고 한다. 사람이 죽으면 누구나 하늘나라에 있는 커다란 슬픔의 나무 밑으로 가게 되는데, 그동안 세상을 살면서 자신이 겪은 고통과 불행했던 일들을 슬픔의 나무 나뭇가지에 걸어 놓게 된다고 한다. 자신의 슬픔이나 고통을 나무에 걸어 놓은 뒤 천천히 나무 주위를 돌면서 자신이 나뭇가지에 걸어둔 것보다 덜 아파 보이는 인생이 있으면 그것을 자신의 것과 바꿔도 된다는 규칙도 함께 주어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누구도 끝내 다른 사람의 슬픔을 선택하지 않는다고 한다. 모두가 잠시 흔들리다가, 오래도록 슬픔의 나무 주변만 한없이 맴돌다가, 결국 자기 아픔을 다시 집어 들고나서 나무를 떠난다는 것이다. 슬픔의 한가운데 있는 나의 불행과 고통이 가장 큰 것처럼 여겨지지만, 슬픔의 나무를 돌며 타인의 고통과 불행을 들여다보다 결국 자신의 슬픔을 다시 집어 들었을 때는 한 결 더 지혜로워져서 가벼운 마음으로 떠난다고 한다. 결국 우리가 버리지 못하고 집어든 건, 고통이 아니라 그 고통을 견뎌온 자기 자신이지 않았을까.
슈베르트가 작곡한 빌헬름 뮐러의 연작시 '겨울나그네'의 보리수를 들으면, 나는 그 슬픔의 나무가 떠오른다.
눈 덮인 길 위에 서 있는 한 그루의 보리수.
그 나무는 방랑자에게 속삭인다.
“여기서 쉬어도 된다. 더는 아프지 않아도 된다.”
실연당한 청년에게 그 유혹은 너무 달콤해서 거의 죽음과 닮아 있다. 함께 사랑을 맹세했던 보리수나무. 극한의 추위속에서 추억을 회상하면서 잠들면 모든 상실과 후회, 외로움이 사라지는 자리. 바로 보리수나무 아래였다. 하지만 청년은 그 나무 아래 머물지 않기로 한다. 그는 다시 일어서 거친 눈보라 속으로 걸어간다.
청년은 왜 다시 추운 눈보라 속을 걸어가기로 선택했던 걸까.
슬픔의 나무 아래에 서 있는 사람들도 자기보다 가벼워 보이는 인생을 고를 수 있음에도, 모두가 결국은 가장 아픈 자기 슬픔을 들고 다시 길로 돌아간다. 그 이유는 아마도 같지 않을까.
고통은 우리를 괴롭혔지만, 동시에 우리가 무엇을 사랑했고 무엇을 잃었고 어디까지 버텨왔는지를 증명하는 흔적이기도 하다. 아픔이 사라진다는 것은 편안해지는 것이 아니라, 나를 만들어 온 시간들이 함께 지워지는 일일지도 모른다. 아프지 않았다면 아프게 한 사람도 없을 것이고 잃지 않았다면 얻은 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보리수의 그늘을 등지고, 슬픔의 나무를 떠나, 다시 불완전한 나의 삶 속으로 돌아가는 게 아닐까 싶다.
인생의 의미는 상처 없는 상태에 있지 않다. 의미는 상처가 생길 때마다 다시 씌여진다. 그래서 상처받은 만큼 사람은 더 성숙해지고 그 변화와 흔적이 곧 삶의 깊이가 된다. 그러니 아이러니하게도 상처 없는 삶에서는 오히려 의미를 찾을 수가 없다.
눈보라 속으로 다시 걸어가는 청년처럼, 슬픔의 나무 아래서 자기 고통을 다시 집어 든 사람처럼, 우리 모두는 각자의 아픔을 들고 오늘을 건너고 있다. 자기만의 슬픔의 무게를 감당하면서 나만의 삶에 대한 진짜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이 인생이지 싶다.
사실 나나 무스꾸리가 부리는 보리수가 가곡인지 몰랐고, 슈베르트가 작곡했는지도 몰랐다. 슈베르트의 가곡들은 지금에도 대중성이 있다. 너무 가난했고 그가 사랑했던 연인들과 이뤄진적이 없었고 31살에 병에 걸려 죽기까지 그의 곁에 남아있던건 음악뿐이던 슈베르트의 곡들은, 처음 들을때는 그런 상처뿐인 인생이라기 보단 어느 귀족집 자제 같은 느낌이다. 아마 슈베르트는 남이 보기에만 남루한 인생이었을 뿐, 그 자신의 세계에선 충분히 아름답고 깊은 인생을 살았나보다.
https://youtu.be/lh2hEoruIx0?si=MSum7la5Fke2kxb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