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hoice 토막글 모음집 #01
10월의 서간문을 열며
여러분, 모두 잘 지내셨나요?
복작복작했던 추석 연휴가 지나고 어느덧 10월 초가 되었습니다. 유난히 아침 저녁 바람이 쌀쌀한 것을 보니 완연한 가을의 시작이네요. 울음으로 눅눅했던 지난 여름을 가을 바람에 낙엽마냥 바삭하게 말려 놓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참 좋은 계절이에요.
브런치에 글을 쓰지 않았던 지난 1개월 간, 저는 잘 지냈습니다. 일상 루틴을 정비하고, 땀 흘리는 운동을 새로이 시작하고, 운동이 끝나면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밤길을 산책해 집에 오고요. 아, 잎차와 영양제도 꾸준히 챙겨먹고 있습니다. 부지런히 나를 먹이고, 입히고, 보살피는 하루들을 보내고 있달까요. 일의 효율이 크게 나지 않아 걱정이지만 이만큼 건강한 신체와 정신으로 다시 살아갈 마음을 먹게 된 것에 감사하게 됩니다. 풍요로 대변되는 가을이라는 계절의 마법일까요.
최근 좋은 일도 있었습니다. 저의 첫 브런치북 <강원도에서 살아보기로 했다>가 에디터픽 신작 브런치북이 되었더군요. 신규 독자들이 어디에서 자꾸 유입되고 있는지 궁금했는데,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1년 전 서핑을 시작하며 브런치에 글을 쓰는 것, 그리고 그것을 엮어 브런치북으로 내는 것을 버킷리스트에 살포시 적어 넣었는데요. 2023년이 아직 3개월이나 남았는데 버킷리스트에 적어둔 일들 중 최소 네 가지를 달성했습니다. 무너졌다고 인식했지만 사실은 나름대로 즐겁게 흘러가고 있는 일 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9월에는 저 자신을 정성껏 돌보는 일에 전념하느라, 긴 호흡의 글보다는 짧게 흘러가는 감정들을 추려 내어 토막글들을 썼는데요. 그 중 다섯 개를 브런치 독자님들께도 공유하려고 합니다. 모두 평안하고 잔잔한 10월의 시작을 맞이하시길요.
눈 돌리면 닿는 모든 곳에 사랑이 내려앉는 계절이다.
누군가의 눈에 비치는 세상은
그의 내면이 투영된 결과라 한다.
사랑의 순간들이 숨쉬듯 목격되는 까닭이
애정이 스미다 못해 흘러넘치는 이 계절의 탓인지,
혹은 내 마음 깊이 배어든 사랑의 탓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사랑 같은 것은 그냥 아무에게나 줘버리면 된다는
황인찬 시인처럼 넉넉한 사람은 아니라서,
풍족한 때일수록 더욱 조심스레 사랑할 순간을 고른다.
양질의 낱알을 고르듯 체하지 않도록
감당할 수 있는 사랑의 양을 걸러 낸다.
각박한 현실이 턱밑까지 칼자루를 들이밀고 쫓아올 때
두 손을 꼭 잡고 도피할 수 있는 낭만의 장면들을
넉넉하게 쌓아 둔다.
이 계절을 만끽하고 싶다.
마음껏 충족하지만 밀려오는 사랑에 잠겨 죽지는 않도록.
닮고 싶은 문장을 써 내는 사람들을
단박에 사랑하게 된다.
그런 문장들은 단어의 나열이 아니라
하나의 미완성된 사람으로 내게 다가오기 때문일까.
꾹꾹 눌러쓴 문장 속에서
그들이 지나온 무수한 시간들을 마주한다.
어떤 순간을 간직하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은 카메라 셔터를 한 번 누르는 것일 텐데.
이들은 그 대신 하나의 순간을 수없이 되새김질 하며,
그것을 표현할 적확할 언어를 찾아내길 선택한다.
생生을 사랑하지 않고서야 그럴 수가 없다.
매일 다른 문장으로 결국 삶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고 있는 그들을 사랑하게 된다.
삶이 대수라 사는 게 힘이 든다는 그대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담 벽에 꽃피운 능소화를 바라보며
웃으시라, 전하고 싶다
고난 끝에 꽃을 피우자는 희망찬 이야기가 아니다
그 외로움 곁에 가 닿을수는 없으나 함께 웃어라도 보자는 것이다
아름답지 못한 세상에서 낙관樂觀은 무형無形이라 생각했던 것을 손에 꼭 쥐어야 비로소 보이는 것일 테니
*능소화凌霄花는 봄을 수놓던 봄꽃들이 다 지고, 녹음의 여름이 도래할 때쯤 피는 꽃입니다.
능소화의 이름은 업신여길 능, 하늘 소 자를 써서 '하늘을 업신여기는 꽃', '하늘을 능가하는 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요. 장마와 태풍, 폭염 등 여름의 천재지변과 같은 8월의 날씨를 견디고 꿋꿋하게 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삶이 대수라 힘이 든다는 사람에게 능소화처럼 꿋꿋하게 견뎌내자는 응원의 말 대신 그냥 지금 당장 함께 웃어보자는 말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제 경험상 인생이나 앞으로의 일이 희망적으로 여겨지는 '낙관'은, 막연한 견딤보다는 없는 것처럼 보였던 것(즐거움, 행복, 성취 등)을 실제로 겪어야 더욱 가까워졌기 때문일까요.
서핑을 좋아하는 일이 마치 허상虛像을 좇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눈앞에 집채만한 파도가 몰려왔을 때,
나는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압도되어 필사적으로 팔을 휘적이며 앞으로 나아간다.
초당 심박수가 높아지고, 근육이 순간적으로 경직된다. 다가오는 파도의 높이를 미터로 가늠해 볼 수도 있다.
분명 '실체 있는' 두려움이다.
그러나 뒤돌아보는 순간
그 파도는 부서져 사라지고 없다.
남은 건 해변가로 흘러가는 잔물결뿐이다.
집채만 했던 파도도, 분명하게 느꼈던 두려움이라는 감정도 전부 헛것이었나?
실체 있던 순간이 단번에 허상이 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또한 어쩌면 허상에 관한 이야기다.
어찌나 생생하게 상상 속의 도시를 묘사했는지
마치 그 도시가 실존하는 것만 같다.
그러나 책을 덮는 순간 결국 그 도시도 허상이 된다.
덧없고 헛헛하다.
사랑의 형태形態
네가 더 궁금한 게 많으니까,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말란 너의 말에 실없이 웃음짓고 만다.
시간이 한정되어 있으니 네가 더 많이 물을 거라나.
한때는 더 많이 묻는 것이 사랑이라 믿었던 나는
이제 고요히 침묵하는 사랑이 좋다.
손에 박인 굳은살의 형태, 비 오는 날에 고르는 음악의 목록,
일어나서 선택하는 커피의 향, 손끝에 닿는 머리칼의 부드러운 정도.
나는 그 모든 것들을 그저 부단히 보고 들으며
사랑이 가닿는 상대의 형태를 조심스레 가늠해 본다.
그에 대해 아무것도 단언할 수 없음에도, 묵묵히 옆에 선 풍경으로 자리하고 싶은 마음.
그것을 내가 가진 사랑의 형태形態라고 정의한다.
물음을 통해 애써 접점을 찾아가며 상대를 재단하고,
원치 않는 윤곽 속에 그 조각을 끼워 맞춰 그것이 사랑이라고.
웃으면서 내미는 형태가 이제는 버겁기에.
p.s.
토막글은 대부분 인스타그램 @rechoice_film 계정에 업로드하고 있습니다. 사진은 모두 제가 직접 찍은 것입니다. 모두들 가을의 선선함과, 주변에 넘쳐나는 사랑을 만끽하시기를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