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하여 앨범 커버는 이러나저러나 음악의 얼굴이 되어준다.
한 권의 책으로 엮이게 될 10편의 글을 네 달에 걸쳐 연재합니다.
우연히 시작된 대부분의 것들이 그러하듯 처음부터 커버 디자인이라는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음악을 듣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음악에 입문하게 되었던 계기 자체가 윤하의 실물 앨범을 통한 특별한 경험과 함께였기 때문에 가랑비에 옷 젖듯 자연스레 가까워질 수 있었다. 물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커버 디자인을 의식하면서 앨범을 대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물리 매체를 통해 음악을 듣는 것이 이후 나의 음악 청취 방법의 기준이 되었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 덕분에 커버 디자인, 더 나아가 CD를 감싸고 있는 총체적인 시각 분야와의 조금 더 많은 접점을 만들어갈 수 있었다.
사실 실물 앨범과 가까워질 수 있었던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첫 계기가 어떠했는지와는 별개로 나의 오래된 성향과 관련이 깊다. 나는 어릴 적부터 수집욕이 굉장히 강했다. 가족여행이든 수학여행이든 어딘가에 놀러 가면 무조건 기념품을 한 가지씩 손에 넣은 채 돌아와야 직성이 풀렸다. 심지어 초등학교 저학년 때 쓰던 그림 일기장이나 지금까지 사용했던 모든 휴대폰들은 물론이고, 하다못해 수험생 시절 만든 요약정리 노트까지 나와 관련된 온갖 것들을 버리지 않고 모아둘 정도다.
물론 이런 성향은 평소에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성격 탓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의미 있고 소중하다고 여겨지는 기억을 손에 잡히는 물성과 함께 엮어두려는 심리가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학창 시절 영어단어를 외울 때 관련된 사물이나 상황을 떠올리는 시각 연상법을 사용하던 것처럼, 외부자극과 기억을 연결 짓는 방법은 그 기억을 상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나의 경우, 그 역할을 해주던 것이 바로 물성이었던 셈이다. 이 성향은 음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좋아하는 가수, 음악이 담긴 앨범을 수집하는 것은 단순히 그 음악을 소유하는 것을 넘어 그 음악과 관련된 기억을 간직하는 나름의 방법이었다.
그렇게 사 모은 앨범들 덕에 나는 대부분의 좋아하는 음악들을 가사집과 함께 감상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앨범에 대한 첫인상이 잊히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래퍼 '화나'의 《Fanatic》이다. 화나의 역작이라 평가되는 음악 자체의 완성도와 별개로 아직까지 이 앨범을 특별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12개 수록곡 각각에 해당하는 삽화가 순서대로 가사집에 실려있다는 점이다. 음악만 들을 때는 직관적으로 의식하기 힘들었던 곡과 곡 사이의 유기적인 관계나 전체적인 서사가 그 그림들 덕에 생명력을 얻고 훨씬 더 명확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마치 그림책을 보듯 한 장 한 장 넘기며 앨범 전체의 흐름을 따라가던 경험은 시각 요소가 음악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피부로 느껴 본 순간이었다. 이러한 경험들은 특히 힙합이나 록 장르의 음악에서 두드러졌다. 한창 열심히 찾아 듣던 밴드 '넬'의 앨범들도 음악 전반의 분위기를 디자인에 녹여낸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앨범을 사는 재미가 유독 남달랐던 기억이 있다.
다만 이때까지도 단순히 가사집과 함께 음악을 듣는 것이 색다른 재미를 줄 수 있다는 감상 정도에서 그쳤을 뿐 '디자인' 자체에 흥미를 느꼈던 것은 아니다. 내가 본격적으로 커버 디자인이라는 분야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음악에 심취해있던 고등학교 시절을 거쳐 기어코 무료 배포 앨범 한 장을 완성하고야 마는 22살 언저리에 이르러서였다.
아쉽게도 온라인 배포였기 때문에 실물 앨범을 따로 제작하지는 않았지만 남부끄럽지 않은 꼴을 갖추기 위해 화룡점정으로 꼭 필요했던 작업이 있었다. 바로 커버 디자인이었다. 곡 작업에 들어갈 때부터 '내가 원하는 느낌은 내가 제일 잘 안다'는 생각으로 손수 작업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앨범 제작의 모든 과정이 내 손을 거쳐 갔다. 그리고 이 경험은 음악가가 전하고자 하는바, 그리고 앨범을 구성하는 각기 다른 요소들이 어떤 식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청자에게 전달될지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 당시 가깝게 지냈던 아마추어 음악가들의 커버 디자인까지 맡아볼 기회도 있었는데, 덕분에 앨범 커버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도 자연스럽게 늘어났다. 이 분야에 진지하게 애정을 가지고 다양한 매력을 발견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때부터다.
앨범 커버가 매력적인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음악의 얼굴, 그리고 음악을 담는 그릇이라는 점이다. 정해진 형태가 없는 물을 어떤 모양의 그릇에 담아내느냐에 따라 보이는 모습이 달라지는 것처럼 앨범 커버 또한 어떤 음악을 처음 접하는 청자들의 뇌리에 그 음악에 대한 시각적인 첫인상을 남긴다. 또한, 여기서 받은 인상은 비단 이미지 한 장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음악 감상 과정에도 두고두고 영향을 끼친다. 이 과정을 통해 앨범 커버는 말 그대로 음악의 얼굴, 실체가 없던 무언가의 시각적 대변인이 되어주는 셈이다. 음악에 디자인이 덧씌워지는 순간, 어떤 음악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은 곧 그 음악의 커버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과 같아진다. 명반이라 불리는 많은 앨범은 커버 이미지마저 수많은 감상과 이야기를 낳곤 한다. 누군가의 그림이나 디자인이 음악을 통해 사람들의 추억과 오래도록 함께 할 수 있다는 점은 지금 들어도 참 낭만적이다.
뿐만 아니라 앨범 커버가 청자에게 끼칠 수 있는 영향력 또한 이 분야를 단순히 포장지 정도로 가볍게 여길 수 없게 만든다. 같은 음악을 듣더라도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 듣는 사람에 따라 제각기 다른 심상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이것은 누가 디자인을 맡느냐에 따라 작업의 결과가 무수히 많은 갈래로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결과물로 인해 누군가는 음악을 듣기도 전에 앨범에 대한 선입견을 품게 될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앨범 커버라는 분야의 책임감에 대해서도 한 번쯤 진지한 생각을 해보게 된다. 수많은 선택지 중에서 커버 디자이너가 어떤 선택을 내리는지에 따라 청자의 음악적 경험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앨범 커버는 실질적인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음악'의 고유한 메시지나 뉘앙스를 왜곡하지 않는 선에서 조연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 앨범 디자인이 특별한 이유는 바로 이러한 수많은 변수가 모여 복합적으로 조율되어야만 만들어질 수 있는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물론 앨범 커버는 앨범이라는 매체의 일부분을 담당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은 앨범이라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물리적인 속성이 많이 약해졌다고는 하지만, 전통적인 '앨범'은 소위 말하는 '피지컬 앨범'을 뜻하는 말이었다. 커버뿐 아니라 CD 표면, 내지 혹은 가사집,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싸는 케이스까지의 영역을 모두 종합한 것이 바로 앨범이다. 그리고 당장 나만 하더라도 CD로 음악을 듣고 가사집을 펼쳐보며 음악에 입문했을 정도로 물리적인 요소는 음악 청취에 있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커버를 포함한 전반적인 앨범 디자인은 결국, 사용자가 음악이라는 콘텐츠를 어떤 과정을 거쳐 경험하도록 할 것인가 하는 맥락을 설계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렇듯 큰 범주에서 경험 디자인의 영역으로도 묶일 수도 있는 종합적인 분야가 바로 앨범 디자인이다.
하지만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사람들이 음악을 듣는 방식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대다수의 청자들 사이에서 주류로 자리 잡게 된 방식은 물성이 사라진 디지털 스트리밍이었다. 뿐만 아니라,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추천 시스템의 발전과 플레이리스트 단위의 청취 방식이 더해져 더는 음악을 골라 들을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실물을 가진 앨범의 역할, 더 나아가 한 음악의 얼굴이었던 앨범 커버의 입지마저 점점 좁아져 버린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입지가 좁아졌다는 사실이 그것이 원래 가지고 있던 의미와 가치를 떨어트릴 수는 없는 법이다. 오히려 그 역할을 세분화하고 그 자리에서의 입지를 단단하게 굳혀나가고 있는 앨범 커버는 더 이상 앨범에 담긴 메시지나 음악의 분위기를 담아내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앨범 커버만이 음악을 대표하던 시대를 지나 다양한 요소가 얽히고설키게 된 환경 속에서 전보다 더욱더 적극적인 방식으로 앨범 커버를 브랜딩에 활용하는 음악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물성의 힘이 약해진 시대 속에서도 도리어 앨범 커버를 강점으로 가지고 가는 다양한 앨범들 덕분에 커버는 시대의 흐름에 맞춰 새로운 옷을 입게 되었고 여전히 음악적 경험의 중요한 요소로서 존재감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물론 시대가 아무리 급변한다 해도 앨범 커버 자체가 사라지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단순히 이미지 한 장에 불과할지라도 웹페이지든 휴대폰 애플리케이션이든 음악을 내걸어 두기 위해선 그 음악을 시각적으로 구분할 수 있게 해주는 수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초기 아이폰과 아이팟에 탑재되었던 ‘커버 플로우’ 기능은 ‘음악의 시각적 구분’이라는 앨범 커버의 근본적인 역할을 다시 한번 상기하게 한다. 애플의 기기들은 디지털 음원 시장의 기폭제 역할을 하며 실물 음반 시장의 침체기를 주도했지만, 이미지로 음악을 구분한다는 앨범 커버의 속성을 디지털 환경에서 극대화해 큰 인기를 끌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결국 앨범 커버의 존재 의미 자체가 기술이나 환경변화와는 완전히 무관하다는 것이다. 앨범 커버는 처음부터 음악이라는 대상에 종속되어 탄생했다. 그만큼 철저하게 수동적인 분야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음악이 기억되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앨범 커버는 이러나저러나 음악의 얼굴이 되어준다. 그리고 그 안에는 음악과 사람들이 지금껏 어떤 식으로 관계 맺어왔는지가 지층처럼 고스란히 담겨있다. 끊임없이 시대 변화에 적응하며 그 모습을 바꾸어온 덕분이다. 그렇게 커버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곧 시대와 사회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맥락을 공유하게 된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음악을 듣기 전에 커버 이미지부터 찬찬히 살펴보곤 한다. 그러면 곧이어 소리 없는 음악이 들려온다. 이제는 어떠한 의식처럼 느껴질 정도로 중요하면서도 당연해진 이 과정은 그 자체로 이미 음악의 일부이자 연장선이다. 이 책은 그러한 경험의 순간순간들을 모으고 모아 만들어졌다. 모든 순간의 중심에 자리 잡은 ‘앨범 커버’에서는 오늘도 언제나처럼 눈으로만 들을 수 있는 음악이 흘러나온다.
글 월로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