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네 개 올리고 브런치 메인에 소개가 되었다. 신기하고 재밌다가, 문득 ,브런치가 열심히 하라고 격려 차원에서 한 번씩 돌아가며 해 주나 싶었다. 조회수가 올라가니 흥분되기도 했지만 이딴 글을 왜 읽어주나 싶어 한 명 한 명이 고마웠다. 조회 수가 그냥 수가 아니라 그 뒤에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니 눈도 뜨끈 해 질 지경이었다.
사람들은 남의 이혼 얘기를 좋아하나 싶기도 하고, 이혼 얘기를 이렇게간절히 기다렸나 했다. 글을 한 편씩 쓸 때마다 딸에게 링크를 걸어준다. 매번 응원을 해주며 피드백을 주는데, 대학을 졸업한 딸도 20년 만에 처음 듣는 얘기들이라 놀라움과 눈물, 웃음을 번갈아가며 읽었단다. 딸에게도 못했던 얘기를 작가 뽕에 취해서 브런치에 막 떠들어 대고 있다.
딸은 다음 얘기가 궁금하다며, 엄마는 언제부터 그렇게 씩씩했냐고 묻는다. 나는 원래 씩씩한 사람이었는데 결혼이라는 전족에, 혹은 경상도 꼴보수 남자라는 전족에 나를 욱여넣으려니 잠깐 바보로 살았다고 했다. 그리고 이혼 후 내 생긴 대로 사니 행복하고 감사가 넘친다고 말해 줬다. 즉, 사람은 지 생긴 대로 꼴 값을 하며 살아야 한다.
이혼한 거 빨리 마무리 짓고 재혼 얘기로 넘어가 행복한 자랑 좀 하고 싶다고 하니, 딸이 진도를 좀 천천히 빼라며 말린다. 딸도 못 들은 얘기라 듣고 싶단다. 세상에 이혼하고 싶은 여자는 널렸고, 남편이 바람을 피웠지만 참고 사는 여자도 많을 거라고 하면서. 하지만 남편의 외도를 안 후 이혼을 준비하고 실천한 나의 사례는 독보적이라고 한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엄마가 너무 자랑스러워 엄마의 브런치 글을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은데 아빠가 너무 부끄러워 자랑을 못 한다는 게 안타까워 죽겠단다. 친구 두 명에게 보내 줬더니 경악하더란다.
누가 내 글을 읽을까? 싶어 제목을 좀 자극적으로 뽑고, 주제도 계속 이혼 얘기만 하고 있다. 이러다 '임성한'작가 뺨을 후려칠 막장 글만 쓰게 될까 겁이 난다.
자존감 얘기, 내 평생의 고민이라 할 말이 너무나 많다. 여행자랑 글? 아프리카, 쿠웨이트, 유럽 사진들 넘친다. 겁나 철학적인 독서 얘기, 중학교 때부터 읽었던 지라 어려운 책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 있다고. 나도 말랑말랑하고 달달한 글 쓸 줄 알고 심지어 잘 쓸 자신도 있다. 근데 누가 내 의견을 궁금해나 할까 싶어 참는다.
내 글이 '다음' 포털 '홈&쿠킹'에 걸리면서 조회 수가 폭주하는 짜릿한 경험을 했다. 블로그를 할 때 요리를 하시는 분이나, 정리, 청소 잘하시는 분들의 글이 네이버 대문에 걸리는 걸 봤다. 연예인이 되어 티브이에 나온 거처럼 부러웠다. 드디어 그런 경험을 브런치가 내게 안겨줬다.
내 수다가 동네에서 먹히는 로컬인 줄 알았는데 전국구로 내놔도 먹히는구나 하는 뽕이 들어갔다. 내 글이 내셔널 급은 되는 거였어, 하는 우쭐함에 한 이틀간 둥둥 떠다니는 반 실성 상태였다.
이제 몇 만을 찍던 조회 수가 평정을 찾고, 나도 뽕빼고 약기운도 빠졌다. 하마터면 약기운에 직장 때려치우고 글 쓰자고 달려들 뻔 했다. 이제는, 할 수 있구나, 그래 열심히 써보자, 커서 뭐가 될진 몰라도. 이런 맘이다.
내가 겪은 불행도 누군가는 부러워할 지경으로 만들자. 왜냐하면 난 그 파도를 헤쳐 나왔고 그 불행을 겪지 않은 사람보다 나는 간이 커졌으니까.
몇 년 전, 남편과 재혼을 하고 여행을 다닐 때 블로그에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을 쓰기 전에 심각하게 고민했다. 내 사연을 어디까지 깔까를. 블로그에 필요 이상으로 솔직하게 다 까서, 친한 블로그 이웃들이 댓글로 당황스럽다고 글을 남기기까지 했다. 하지만 난 포장할 거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글은 내 치료를 위해 시작한 것이기 때문이다.
블로그에서는 긴 글이나, 솔직한 글을 잘 읽지도 않고, 부담스러워한다. 이제 브런치에서 다시 테라피스트를 만나고 있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고, 어느 날 사라져도 아쉬워할 사람 하나 없는 잡글을 쓰지만 내 나름 원고 마감 압박을 받는다. 하나하나 올릴 때마다 내 불행들은 나의 간을 키웠고 공감 능력을 키웠다는 걸 깨닫는다.참 감사하다. 그 지난 날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