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다 엄마를 너무 사랑해서 그래
<나는 니가 죽는 것도 보고 싶어>라는 노래가 있다. 작곡가가 무슨 의미로 가사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노래를 제일 처음 듣자말자 엄마가 생각났다. 엄마가 죽기 전부터 좋아했던 노래고, 엄마가 죽기 전부터 이 노래를 들으면 엄마 생각이 났다.
니가 자라는 걸 못 봐서
지금 더 많이 보고 싶어
순간 흐르는 지금을
넘어서 죽는 것까지
죽기 전 가는 시간을
또 지나고 또 보내기
한참 전까지
퓨어킴 - 나는 니가 죽는 것도 보고 싶어
나는 엄마가 나를 낳기 이전, 오롯이 ‘강단형’이던 시절의 엄마를 모른다. 본 적도 없다. 나를 낳으며 엄마는 평생을 바쳐 나를 사랑하리라고 다짐했을까? 유도신문하듯 물어본 것이긴 하지만 엄마는 나를 낳고 품에 안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아, 이 아이는 앞으로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게 될 사람이구나.
엄마에게 자주 물었었다. 터무니없는 말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어쩐지 그런 의심이 드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엄마, 엄마도 아기일 때가 있었어?” 그럼 엄마는 당연하다는 듯이 “하! 참나. 당연한 걸 물어?” 하고 대답했지만 엄마는 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질문을 하는지 다 알고 있는 느낌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엄마는 평생을 나의 엄마였는데, 그런 그녀에게도 엄마가 아니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지만서도 또 한편으로는 믿어지지 않아서 몇 번이고 확인하고 싶어 하는, 나의 생각을 말이다.
나는 이런 질문도 자주 했다. “엄마, 나는 낳을 때부터 이렇게 어른이었지?” 내 어릴 때 사진을 보고 있어도 이게 나라는 것이 안믿긴다. 내가 이렇게 어린 날이 있었나 싶다. 작년부터인가 왠지 모르게 출산, 육아 브이로그를 자주 찾아보았는데 그렇게 작은 씨앗 같던 아기가 자라 세상에 나고 밤낮없이 어르고 달래 키워내는 과정이 보통이 아니었다. 밤잠없이 3년을 꼬박 길러도 아기는 아직 뜀박질도 못한다.
분명 나도 그랬을텐데, 나는 언제 이렇게 컸나? 엄마도 이럴 때가 있었겠지.
딸들은 숙명적으로 엄마의 나고 자라는 모습을 볼 수 없다. 그래서 엄마의 죽는 모습이라도 보고 싶어 하는 내 마음을 저 노래가 잘도 표현해주고 있다. 그리고 진짜로 엄마가 죽는 모습이라도 볼 수 있었으니 그래도 나는 행복한 딸이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엄마가 재혼을 한 뒤 나는 엄마에게 종종 이런 말을 했다. ‘엄마가 나를 사랑하는 것 보다 내가 엄마를 더 사랑하는 것 같아서 섭섭해. 하지만 내가 엄마를 더 사랑한다 해도 어쩔 도리가 없어.’ 엄마는 코웃음을 쳤다. 세상의 어떤 딸도 엄마가 딸을 사랑하는 것 보다 더 사랑할 수는 없단다. 난 정말 진지하게 한 말인데 코웃음을 치며 대꾸하는 엄마의 말을 나는 곰곰이 생각해보다 별안간 경외감이 들었다. 내가 엄마를 이렇게나 사랑하는데 엄마는 이것보다 더 나를 사랑한다니, 그 사랑은 도대체 어떤 것 일까?
요즘은 길에 다니는 아이만 봐도 그래, 나도 저럴 때가 있었지. 저렇게 어린 나를 엄마가 먹이고 씻겨 이렇게 길렀구나 하는 생각에 코끝이 찡하다. 그리고 생각한다. 나중에 내가 저 어린 것을 낳으면 내 인생에서 다시없을 사랑으로 길러내겠다고. 나를 보고 그렇게 결심했을 엄마의 다짐을 이어받아 내가 나를 그렇게 길러내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