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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녕 Jan 10. 2020

이혼, 그까짓 게 뭐라고?

폭력은 그 누구도 토를 달 수 없는 큰 이혼사유일 것이다. 하지만 많은 아내들이 초기에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자신도 아이도 깊은 상처를 입은 후에야 용기를 낸다.


요즘은 여자에게 맞고 사는 남자도 많다고 반박을 하고 싶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비율에 있어서나 치명적 위협에 있어서 남성의 폭력에 비할 바가 아니다.


부모가 자녀를 학대하거나 학교에서 약한 친구를 괴롭히는 것은 범죄로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남녀 관계에서 일어나는 폭력은 '사랑싸움'이나 '가정사'로 취급해 버린다.


내가 전남편의 폭력성을 경험한 것은 상당히 초기였다. 그때는 누구에게 말을 할 곳도 없었고,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해 본 적도 없었다.


큰아이가 어렸을 때였다. 전 남편의 친구들 모임이 매달 한 번씩 있었다. 그 날은 전남편의 친구 집에서 모임을 하기로 했었다. (그 친구의 아내는 나중에 전남편의 상간녀가 되었다.) 당시 나는 둘째를 임신한 상태라  내 몸하나 빠르게 챙기는 것도 힘든 상태였다. 외출한 번 하려면 큰 애 까지 챙기려니 분주하기 짝이 없었다.


약속 시간에 촉박해 나서고 보니, 큰 아이의 신발이 작고 더러워서  볼품이 없는 것이었다. 당시 겨우 아장아장 걷던 시절이었는데 놀이터에서 몇 번 돌아다녔더니 신발이 더러워져서 낡아 보였다. 그렇다고 정해진 시간에 늦을 것 같은 상황에 굳이 새 신발을 사서 신길 필요도 없고 시간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남편은 잠깐 신발을 사서 신겨서 가자는 주장이었다. 나는 여러 사람이 기다리는 저녁 모임에 우리가 늦으면 새로 상을 차려야 하니 그냥 가자고 했다.  


새 신발을 사서 가느냐, 약속 시간에 맞춰 그냥 가느냐로 옥신각신 싸우다 말고 전남편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리고는 베란다로 가서 화분을 거실로 냅다 던지는 것이었다. 와장창 화분 깨지는 소리와 큰아이 울음은 내 입을 막아버렸다. 그렇게 싸움은 종료가 되긴 했다.


결국 신발도 못 사고 모임에는 왕창 지각을 하고 말았다. 누구의 의견도 이루어진 게 없으니 이긴 사람은 없고, 남편의 폭력성만 끄집어낸 꼴이었다.


아이의 낡은 신발이 뭐 그리 부끄럽다고 새 신발을 사서 신기고 싶었는지 이해가 안 되었지만, 더 기가 차는 것은 화가 난다고 화분을 집어던지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내가 참을 걸, 지각 좀 하면 어때서 그렇게 내 주장을 했을까?' 나를 탓했고 내가 사과하는 걸로 마무리 지었다. 평화를 위해서, 분란을 막기 위해서.


나중에 생각하니, 전남편은 상간녀 집에 아이를 데리고 가는데 초라해 보이는 게 싫어서 그다지도 강력히 신발을 사자고 한 것이었다.


이유가 어쨌거나, 그때 내가 사과를 해서 급히 조작된 평화를 가져 올 게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상담을 하고 대책을 세워야 할 일이었다. 당시 친정 엄마와 매일 통화를 하다시피 했지만 나는 속을 털어놓지 못했다. 엄마에게 얘기를 했어도 나를 나무랐을 것 같았다. 그냥 져 주라는 말과 함께.  


남자의 폭력성에 우리는 너무나 관대하게 교육을 받았다. 남자는 원래 그러니까 봐주고 이해해 주고, 흥분이 가라앉으면 차근차근 얘기해 주라고 한다. '원래' 그렇게 폭력성이 있다면, '특별히' 더 교육을 시키는 게 마땅하지 어떻게 이해하라고 가르칠 수 있을까?


남편이 버럭 소리를 지르면 온 집안 분위기가 살벌해지니 대부분의 아내들은 억울하고 화가 나도, 참거나 남편을 달래는 게 빠르다는 걸 깨닫는다. 하지만 문제점은 그 패턴이 아이들에게도 학습이 된다는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를 학습해서 그래도 되는 줄 알고 반복한다. 엄마들은 자기의 방법이 최선이라며 딸에게 참으라고 교육시킨다.


어떤 사람은 내 주장 한 마디를 꺼내는 게 참는 것보다 힘들 수도 있다. 우선은 평화가 유지되니 내 기분 따위는 잠시 접어두고 참는 게 나아 보인다. 하지만 사람의 감정은 먼지처럼 쌓여서 분명히 어떤 형태를 이룬다. 쌓인 감정은 폭발을 시켜 배출을 해야 사람이 산다. 배출을 못 시키면 억울한 감정이 독소가 되어  마음과 몸을 병들게 한다.


내가 남편과 갈등을 겪으며 고민을 하는 동안, 분별력 있게 충고를 해 줄 사람이 하나라도 있길 간절히 원했다. 나의 엄마는 '착하신데' 강하지 못했다. 내가 남편의 외도로 이혼을 고민 중이라고 털어놨다면 나 보다 엄마가 먼저 앓아누웠을 것이다. 그러니 얘기를 할 수가 없었다.


엄마가 '분별 있게' 강해져야 딸들이 제대로 의논을 할 수 있다. 연애를 할 때부터 나쁜 남자를 거르는 방법을 알려줘야 한다. 마마보이 기질이나 폭력성, 바람기는 엄마들이 딸들보다는 잘 알아볼 수 있다. 엄마들은 딸들이 언제든지 상담을 할 수 있는 열린 자세가 되어야 한다.


20세 넘은 딸이 남자 친구가 생기면, 절대 아이스크림만 먹고, 남자 친구가 사주는 곰인형이나 들고 집으로 오는 게 아니다. 19금 상담도 해 줄 수 있는 엄마가 되어야 한다. 딸아이가 남자 친구의 이상함을 경험해도 엄마에게 먼저 얘기를 못하는 건, 딸이 남자 친구와 성관계까지 한다는 사실을 숨겨야 하기 때문이다. 그 얘기를 하면 엄마가 먼저 뒷목을 잡고 털썩 주저앉을 판이니 엄마는 의논 상대에서 빠지게 된다.


딸들을 외롭고 두렵게 만드는 엄마가 되지 않길 바란다. 딸이 두려워하는 것보다 엄마가 더 겁을 먹어선 안된다. 그러려면 엄마가 냉정하고 강해져야 한다. 내가 행복하지 않았던 것은 딸도 안 행복하다. 내 기질대로 말을 하고 나댈 수 있어야 건강한 것이다.


힘든 걸 오래 참은 사람은 딸이나 며느리에게도 참으라는 말을 하기 쉽다. 나의 엄마나 시어머니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남편이 화가 났다 싶으면 나를 보고 잠깐 소나기를 피하듯이 참으라고 했다. 벼락같은  소나기가 지나면 얘기를 해서 알아듣게 하란다. 당신들이 그렇게 살아왔으니 똑같이 교육을 시키는 것이다. 자신도 그로 인해 울화병을 키웠으면서 딸들에게 또 대물림을 시키는 꼴이다.


사람이 살면서 서로 의견이 다를 수밖에 없다. 다른 의견을 비교해서 더 나은 걸 선택하면 된다. 의견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언성이 올라갈 수 있지만 화가 난다고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집어던진다면 이건 완전히 다른 싸움이 된다. 애초에 무슨 논란이 있었는지는 잊어버리고 싸움만 커져서 돌이킬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폭력성이 나오면 약자는 위협을 느끼게 되고 멈칫 물러나, 져 주지만 결국은 마음에 병을 일으킨다. 약자에게 내놓는 폭력성은 점점 강도가 세 진다.  초장에 잡지 않으면 서로의 병을 키우는 격이 된다.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민이 생겼을 때, 바로 엄마가 필요한 시간이다.

이혼, 그까짓 게 뭐라고 병까지 키우며 살아야 하느냔 말이다.



엄마가 되어, 언니가 되어 손을 내밀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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