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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녕 Jan 28. 2020

가장 보통의 복수여행

전남편 카드로 여행 가 보셨나요?

세상 들어주기 힘든 얘기가 자식 자랑이고, 보고 싶지 않은 사진이 남의 가족 여행 사진인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 자랑은 재미가 있어서 남이 화제를 돌려주지 않으면 푼수처럼 줄줄 나온다. 듣기는 괴로워도 하는 건 재미가 있나 보다.


남의 가족 여행 사진도 비슷하다. 친구나 친척들 모임에서 가족 여행 얘기를 시작하면 듣는 사람은 없고, 자기 얘기를 하기에 바쁘다. 가끔은 자기 얘기를 하려고 상대의 자랑을 참고 들어주는데, 그 상대가 알아서 끊어 주지 않으면 타이밍을 놓쳐 자기 얘기를 못하기도 한다. 그러면 그 대화는 재미가 없게 끝이 날 뿐만 아니라 그 관계도 흔들릴 수 있다.


글을 쓰는 것도 대화라고 봤을 때, 세상 재미없는 게 자식 자랑과 가족 여행 이야기이다. 특히나 자식과 패키지 여행을 갔다면 딱히 줄 정보도 없고 재미는 더 없을 것이니 글감으로는 꽝인 셈이다. 하지만 굳이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자랑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어서 이다.


예전에 방문 수업으로 영어를 가르칠 때, 예쁜 앞치마를 입고 아이들의 간식을 챙기며 주부 노릇을 하는 엄마들이 참 부러웠다. 전업 주부들의 상황이 부러운 게 아니라, 주부 노릇을 만족해하는 마음의 상태가 부러웠다.


남편의 성취를 나의 성취라 여기고, 자식의 뒷바라지가 나의 보람이라 여기며 성심껏 알뜰살뜰 희생하는 모습이 부럽고 대단해 보였다. 그 위치에 나를 대입해 보았을 때, 나는 절대 행복할 수 없는 재질이다. 내 기질이 원망스러워, 보드라운 재질로 낳아주지 못한 부모님까지 원망해 봤다. 남편을 ATM이라 여기며 살지 뭐 그리 잘나서 이 고생을 하며 사나 싶기도 했다.


생일에 남편에게서 받은 가방을 자랑하거나 결혼기념일에 받은 꽃다발을 카카오 프사로 놓으면 참 보기 힘들었다. 내 혼자 심통이 났다. 지금 생각하니 참 부끄러운데, 내 정신건강을 위해서 안 보는 게 낫겠다 싶은 지인은 잠시 '숨김'에다 옮겨 놓기도 했다.


나 스스로 내가 너무 싫어 쓴 방법은 먼저 부럽다고 칭찬해 주는 것이었다. 혼자 속으로 부러워하면 내가 처량해 보이고 상대가 부럽다 못해 미워지기까지 했다. 자꾸 부럽다 해 주면 적어도 상대가 미워지지는 않고, 부러움이 오래 머물지도 않는다는 걸 발견했다.


손석희만 한 발 더 들어가는 게 아니라 나도 한 발 더 들어가 보았다. 내 불행도 잘 사용하면 그리 나쁘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자. 내가 선택한 모든 것은, 나름 더 나은 것을 더 행복하려고 했던 일이다. 더 행복하려고 결혼했고 더 행복하려고 아이를 낳았다. 해 보니, 힘든 것도 있어서 더 행복하려고 이혼을 선택했다.


그렇다면 분명 이전보다 더 나은 점이 있을 것이다. 내가 선택하지 못한, 놓친 무엇을 아쉬워하느라 내 인생을 낭비할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결과를 고마워하면 될 일이다.


돌봐야 할 자식이 있으니 삼시 세 끼 열심히 밥을 했고, 덕분에 나도 밥을 잘 먹고살 수 있었다. 적게 일해서 조금이라도 더 벌려고 '노오력'을 하다 보니 일도 수월해졌다. 약간의 시간도 허투루 쓰기 싫어 이것저것 만들고 그리다 보니 내 인생이 더 다채로워 졌다.


이 모든 경험과 고생들이 지금은 글감이 되어 주고 있다. 책으로 나와 행여 잘 팔려 주기라도 한다면 내 글은 돈까지 줄 지도 모르겠다. 허벅지를 찌르며 살아온 날들이 예술로 거듭날지도 모르겠다는 신나는 상상을 해 본다.


글을 쓰면서 예전 기억들을 쥐어짜다 보니 참 아프기도 했고 억울하기도 했다. 딸에게 억울한 심정을 호소하다가 생각해 낸 것이 복수여행이다. 딸이 패키지 여행을 예약하고는 명절이 시작되자마자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으로 가는 버스비부터 전남편이 딸에게 준 용돈 카드를 사용했다.


딸이 아빠의 카드를 주면서 하는 말이,

"옛다, 엄마 전남편 카드!!"


전남편 카드로 복수여행을 가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생각할수록 통쾌하다. 정작 카드 주인은 몰라서, 자기가 복수를 당하는 줄도 모른다는 게 안타깝긴 하다. 예쁜 홈드레스를 입은 전업 엄마도, 생일에 받은 명품 가방 선물도 부럽지 않은 날이 내게도 왔다.


패키지로 여행을 다니는 중인데, 열 명이 넘는 가족단위로 온 팀이 둘이고 모녀 여행 팀이 우리 말고도 한 팀 더 있다. 자유 시간에 딸과 둘이서 예쁜 석양을 찾아다니고 호텔로 들어와 그림을 그렸다. 딸이 가족여행 팀의 대화를 얼핏 들었다고 한다. 그 가족 팀들은 호텔에서 3대가 함께 있는 것이 더 힘들어 모든 옵션 투어를 선택했다고 하더란다.


우리는 둘이서 조용히 쉬었다가 멋진 풍경을 보며 감탄하고 들어 왔다. 호텔에서 그 감동을 그림으로 그리는 여유를 누리는 여행을 할 수 있어서 너무 좋다는 것이다. 맘이 딱 맞지 않으면 가만히 있는 게 훨씬 피곤하고, 그래서 자꾸 밖으로 나가는 투어를 해야 하는 것 같다는 것이 딸의 추론이었다.


전남편 카드로 딸과 하는 여행은 나에게 꿈을 이뤄 준 여행이다. 내가 겪은 모든 '화'가 '복'으로 돌아오는 중인 거 같다.


요 정도 복수는 해 줘야 가장 보통의 복수가 아닐까 싶다.



해양 액티비티에서 일몰이 예쁜  비치로 가는 택시비까지 전남편 챈스를 사용한 꿈의 여행


호텔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자니, 딸이  사진을 찍어 대며 말했다. 그림을 그리는 엄마 모습이 더 작품이라고.



https://brunch.co.kr/@red7h2k/52

https://brunch.co.kr/@red7h2k/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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