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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녕 Jan 31. 2020

재혼 결혼식은 어떻게 하나요?

부모로부터 완전히 독립을 하려면 이혼을 하면 모든 게 빠르다. 결혼을 할 때는 온 가족의 관심과 지지를 받으며 하지만 이혼을 할 때는 누구도 옆에 있어 주길 자처하지 않는다. 이혼이야 말로 어른이 되는 지름길이다.


이혼을 하면 당분간은 연애와 결혼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된다. 친구의 결혼식에 가서  친구에게 축하한다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 친구 말이 내가, "이게 축하할 일인지 모르겠다만, 축하해." 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니 엄청 미안하다. 그 친구는 지금도 축하받기에 충분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데 말이다.


세월이 흘러 아이들도 자라고 내 마음도 여유가 생기니 결혼이라는 걸 생각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엄마를 간호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 노후가 두려워졌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와 둘이 살면서 진지하게 내 노후에 대해  그림을 그려보는 시간이 되었다.


재혼을 하기 전 아버지에게 결혼을 하고 싶다고 말씀을 드렸다. 아버지는 아주 반가워하시며 웃음으로 축하해 주셨다. 하지만 남편의 상세한 조건을 듣고는 나를 애처로워하셨다. 지금도 아버지는 내가 잠깐의 일탈적인 결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신다. 고향을 떠나 외국인과 사는 삶이 안정적이지 않고 부실해 보이며,  불안해 보이는 것 같다.


아이들은 의외로 담담히 받아들여 주었다. 물론 속으론 당황하고 충격이었겠지만 다행히 내색은 하지 않았다. 친구들이나 주변의 지인들, 바느질 공방의 고객이자 친구가 된 사람들은 모두 축하해 주었다.


막상 결혼식을 한다고 생각하니 재혼식은 어떻게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일반적인 결혼식과 같이 예식장에서 하는 방법이 있었다. 가족들과 함께 밥을 먹는 걸로 간단히 하는 방법도 있는 듯했다.


재혼을 하기 몇 달 전에 바느질 공방의 한 손님이자 친구가 된 언니가 친구 결혼식을 다녀왔다고 했다. 나는 그 언니의 친구 자녀가 결혼식을 하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 그 언니의 동창 친구가 재혼을 하는 것이었다. 그 언니의 동창 친구분은 일반 예식장에서 했고 신부의 부케를 남자 동창들이 서로 받으려 줄을 섰다고 했다.


나는 초대할 사람도 많지 않았고 남이 주도하는 결혼식을 다시 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무리 검색을 해도 재혼 결혼식의 마땅한 사례가 없었다. 결국 내 맘대로 새로운 양식을 만들기로 했다. 혹시나 누군가에게 참고가 될까 싶어 글을 쓴다.


오빠에게 재혼 얘기를 했더니 오빠가 친척들을 모두 초대하게 되었다. 친구와 지인들을 선정해 보니 200명이 금방 되어 버렸다. 연회장이 있는 식당을 예약했다. 사회는 사촌 동생에게 부탁을 하고 동네 친구의 축가와 작은 아버지의 트롬본 연주를 순서에 넣었다. 거의 경로잔치 분위기 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순서는 내 지인 세명의 축하 메시지와 남편의 학교 동료 선생님의 축하 인사였다. 내 쪽의 지인으로는 오빠와 친구, 내가 속해 있는 한 모임(카네기 리더십)의 회장님이 해 주었다. 내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해 줄 세 분을 나름 엄격히 선정한 셈이다. 남편의 동료 선생님도 남편이 한국에 도착하는 날부터 지금까지 연락을 하며 지내는 선생님이다.


축하 메시지를 전달한 후 나와 남편이 직접 오신 손님들께 감사 인사를 했다. 오랜만에 결혼을 하니 떨리기도 했고, 행복해서 떨리기도 했다.


결혼식 끝에는 당시 내가 참여했던 '카네기 리더십 강의'에서 주는 시상식도 있었다. 교육을 같이 받은 회원들이 한 명을 투표로 mvp를 뽑는데 내가 선정이 되었다고 했다. 진짜인지 축하해주려 한 말인지는 몰라도 결혼식장에서 mvp트로피까지 받았다.


작은 아버지의 축하연주와 친구의 축가로 결혼식을 시작해서 지인들의 축하 메시지를 했다. 나와 남편의 답례 인사를 마치고 카네기 시상식까지 하니 거의 두 시간이 걸렸다. 식사와 사진 촬영으로 결혼식을 마치니 진짜 결혼을 한 것 같았다.


내가 순서를 짜고 결혼식에 내가 참여하는 방식이 괜찮은 듯했다. 축의금은 받을 계획이 아니었는데 모두들 봉투를 찔러 넣어 주셔서 어쩔 수 없이 받게 되었다. 200명의 식비는 오빠가 계산 해 주었다. 친지들의 차비까지 아버지가 챙겨 주셨다. 남편은 결혼식에 돈봉투를 받는게 신기하다 하면서도 사람들이 generous(관대한)하다며 놀랐다. 집에와서 봉투를 열어보며 정성스러운 축의금과 손 편지들에 감격을 했다.


결혼식을 마치고 집에 오니 수많은 축하 문자가 와 있었다. 늦게서 결혼식을 하는 내 모습이 짠해서인지 두 번 결혼하는 내가 부러워서 인지 결혼식 내내 눈물을 참느라 힘들었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재혼 후, 호적에만 이름을 올린 게 아니라 남편의 등짝에도 이름을 올렸다. 남편이 자기 이름과 내 이름을 한글로 써 달라기에 붓펜으로 써 줬다. 그랬더니 그 모양 그대로 문신을 등짝에 얹어 온 것이었다.



첫여름방학 때, 남편이 거래하던 미국의 은행과 보험회사에 들러 상속자를 나로 바꿨다. 싸인을 모두 마친 후 은행 문 앞에서 남편이 말했다. "Don't try to kill me." 나 죽이려고 하지 마라고.


이제 곧 결혼 5주년이 된다. 사실상 아직 신혼이고, 남편이 있다는 게 참 고맙고 신기하다. 어떨 땐 자다가도 남편이 내 옆에 잘 있나 확인을 한다. 자는 남편을 다시 봐도 감사하다.


오랜만에 결혼을 하려니 어찌나 떨리든지


작년 결혼 기념일에 결혼식때 입은 옷을 똑같이 입고 찍었다. 뽀샾이 심해서  결혼식때 보다 더 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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