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녕 Jan 02. 2020

딸아, 엄마 결혼식에 축가를 불러 줄래?

딸은 대학을 가고 엄마는 시집을 가고


     변호사도 입을 쩍 벌린 감동의 이혼 소송서를 작성하여 변호사 없이  바로 인지를 사서 붙여 소송을 제기했다. 변호사는 내가 청구한 금액을 보며 택도 없는 위자료라며 나에게 모욕감을 주었었다. 결국 원하던 만큼은 아니지만 7년 결혼 생활의 퇴직금이라고 위안 삼을 만한 위자료를 받고 이혼을 했다.


한복 바느질을 열심히 하였고 주변에서는 한복집을 차리라고 했지만 나는 한복집을 하는 내 모습이 그려지지가 않았다. 아이들은 친할머니에게 보내고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원래 드라마에도 이별을 하면 비행기 장면이 나오면서 누구 하나가 떠나지 않는가?


 딸아이가 중학교 1학년 때 현재 남편을 만났다. 나는 그 당시 시골 초등학교의 방과 후 영어 수업을 했고 현 남편은 지역 중학교 원어민 교사였다. 초등학생들 영어 철자 대회인 '스펠링비'를 하는데 내가 사회를 보았고 남편은 심사위원으로 오게 되었다.

 

   현 남편을  봤을 때, 첫눈에 심 쿵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전 남편 때도 들었던 소리인지라 그냥 무시하려 애를 썼다. 몇 번을 마트에서, 길에서 마주쳤고 그때마다 그냥 반갑게 날씨 얘기나 근황을 얘기하는 사이였다. 그러다가 어떻게 집까지 차를 태워주게 되었다. 얘기를 해 보니 현 남편이 꽤나 편안한 대화 창구라는 걸 발견하게 되었다.


   시골에서 살았기에  돌아서면 건너 건너 다 아는 사이라 나는 이혼을 했다는 사실을 이순신 장군의 유언처럼 비밀로 하며 살았다. 사적인 친구라곤 단 하나도 만들지 않고, 오직 일로 만나는 사이의 인간관계만 유지했다. 그런 외로운 싱글맘 생활을 하던 30대 후반 시절, 현 남편은 나의 온갖 고민을 들어주는 대나무 숲이었다. 남편이 외국인이니 소문을 낼 곳이 없다는 게 안심이 되었고, 끊임없이 예쁘다, 똑똑하다 해 주니, 여자로서의 매력도 죽지 않았다보다 싶어 즐거웠다.


   병석에 누워계시던 엄마가 7년 만에 돌아가시고 딸아이는 기숙사가 있는 학교로 가고, 아들도 학교에서 문제가 생겨 강제 전학으로 멀리 갔다. 큰 집에 덜렁 아버지와 나 둘이서 각각 집을 반으로 나눠 쓰는 독거노인의 생활에 들어가게 되었다. 날씨가 추워졌다, 기름값이 올랐다 뭐 이런 소소한 얘기를 할 사람도 없어졌다. 문득 혼자 남을 내 노후가 두려워졌다.


   남편과 몰래 만나는 동안, 현 남편은 언제까지 자기를 장롱에 숨겨 두는 것처럼 모두에게 비밀로 할 거냐는 말을 자주 했다. 장롱에서 언제 꺼내 줄 거냐고 농담을 하면서. 결혼을 하고 싶다고 몇 번이나 말을 꺼냈지만, 내 인생에서 다시 결혼이 있을 거라고 생각도 한 적이 없다.


아들이 초등학교 4학년 때, 영화에 재혼하는 장면을 보다가 "저러면 안 되지. 엄마가 무슨 결혼을 해?" 하길래 그럼 엄마는 계속 외롭게 혼자 살아야 하냐고 물었다. 아들은  " 그건 재혼이지, 그건 안돼" 하는 것이었다.


재혼이란 단어를 아는 것 신기했고, 나쁘다고 인지하는 것은 놀라웠다.  "그럼 너도 하지 말고 엄마만 사랑해줘. 그럼 엄마도 재혼 안 할게."라고 했다. 엄마는 한 번 했으니, 자기도 한 번 결혼을 해야 공평하단다.


그랬는데, 아들이 결혼을 하기 전에 엄마가 먼저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아들이 나의 재혼 후 쓴 편지는 나를 두고두고 울게 했다. 아들은 아빠와 살았고, 딸은 엄마랑 살면서 주말마다 어수하게 보낸 아들이 쓴 편지였으니 오죽했을까. 엄마와 함께한 기억이 초등학교에서 멈췄고, 그 기억마저도 가물가물 하다는 아들이, 엄마의 행복을 기원한다는 내용이었다.


 딸이 수능을 치고 아들이 고3이 될 때 결혼식을 했다. 딸은 펑펑 울면서 엄마가 누군가의 부인이 된다는 게 적응이 안된다고 했다. 그렇겠지. 나도 누군가의 아내는 정말 오랜만이고 낯설어 적응이 안되는데. 열아홉, 일곱 살의 나이에 엄마를 시집보내는 아이들의 마음을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큰 아이인 딸이 수능을 끝내고 발표를 기다리면서 많은 대화를 했다. 딸의 사춘기 시절과 내 사이비 종교에 빠진 시기가 겹쳐 우리는 모두 힘든 시기를 보냈었다. 딸과 내가 모두 사이비 종교에서 빠져나온 후 우리는 강한 연대감과 동지애가 생긴 것 같다. 무엇보다 사이비에 빠진 내 어리석음은 백 퍼센트 내 과실이니 무조건 미안했다. 내 부족함을 인정하고 사과를 하니 상처와 앙금이 차차 사라졌다.


딸이 엄마의 결혼식에 부른다고 <someone like you>라는 노래를 연습했다. 그 노래는 남편이 나에게 청혼을 할 때, 같이 찍은 사진들을 모아 나에게 뮤비를 만들어 줬다. 그 뮤비의 배경음악이 <someone like you>였다. 딸은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 연습을 몇 주 했지만 결국 나의 결혼식에서 부르지는 않았다. 안 울고 부를 자신이 없었다고 했다. 그 말에 또 우리는 안고 울었다.


 딸아이는 피아노를 치며 곡을 쓰는 걸 취미로 하는데 나에게 처음으로 곡을 만들어줬다. 자작곡을 만들어 나에게 편지를 쓴 것이다.


나는 재혼을 한 후 바로 중국으로 갔어야 했다. 현 남편이 중국에 있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게 된 상황이었다. 딸은 엄마를 시집보내는 것도 섭섭한데 외국으로 가게 되었으니 더 슬퍼했다. 대학생활을 시작한 딸과 중국에서 사는 엄마는 날마다 톡을 주고받으며 모녀가 아니라 선 후배 같은 사이가 되었다.


당시 딸은 슈퍼스타 k 같은 오디션 프로에 참여하고 싶어 했었다. 엄마의 재혼으로 인해, 드디어 JYP랑 인터뷰를 할 때 스토리가 생겼다는 것이다. 흑인 스텝 파더가 생겼다고 얘기할 거라고 해서 한참 웃었다.


잠깐 한국에 나와서 딸의 자취방에 며칠 머문 적이 있었다. 딸과 좁은 방에서 며칠 부대끼며 있으니 좋기도 했지만, 그래도 현 남편이 있는 중국의 집에 빨리 가고 싶은 맘이 들었다. 그 얘길 했더니, 딸은 섭섭하다고 난리를 부렸다. 어떻게 딸이랑 있는데 불편하다는 말을 하냐는 것이다. 듣고 보니, 나는 나쁜 엄마구나 자책을 했다.


중국으로 돌아가 현 남편에게 얘기를 했다. 나는 나쁜 엄마인 것 같다고. 현 남편은 나쁜 엄마가 아니라 굿 와이프라고 위로해 주었다. 나는 착하지 않은 엄마일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행복한 여자가 되었다.


  



5년 전, 딸이 고3 때 만든 곡으로, 결혼하는 엄마에게 준 노래. 연주와 노래가 너무 부끄럽다고 딸은 새로 만들려고 했다. 나는 이 목소리 그대로 좋다.

https://youtu.be/-9aCQXGPkKA

엄마에게  by 률

https://brunch.co.kr/@red7h2k/38

https://brunch.co.kr/@red7h2k/57


작가의 이전글 여자가 밥벌이를 하러 나가면 듣는 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