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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녕 Dec 31. 2019

여자가 밥벌이를 하러 나가면 듣는 말

생계형 예술가의 갸륵한 공방 창업.

방과 후 영어 수업과 방문 수업으로 어느 정도 수입은 되었지만 나의 창작 욕구는 여전해서 틈틈이 바느질을 했다. 옷을 만들어 그 위에 패브릭 물감으로 그림을 그려서 입곤 했었다. 식탁보나 커튼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는데 주변에서 자기도 해 달라는 주문이 많았다.


영어 수업에서 지친 심신을 바느질로 달래주는 느낌이었다. 그림을 그려 뭔가를 완성해 내면 반신욕을 하고 난 듯한 플래시 한 느낌이 들었다. 뇌의 다른 기능을 사용해서 내 멘털에 발란스를 맞춰 주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영어를 가르치는 일과 바느질, 그림은 내가 아무리 부자여도 안 하고는 못 배길 것 같은 일이다.


바느질은, 예로부터 팔자가 센 여자들이 하는 일이라고 부모님은 마땅찮아하셨다. 바느질을 한다 하면 사람들은 신기해한다. 직업으로 바느질을 한다 하면 가엾게 보는 사람많았다. 내가 좋아하는 건 특히나 한복이니 , 청승맞게 본다. 바느질, 그림, 도자기.. 이런 것들을 좋아해서 팔자가 센 건지 원래 팔자가 세서 이런 걸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예전에 주변 지인이 나에게 결혼을 하자며 던진 말은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다녕 씨가 좋아하는 일들이 결국 한식당을 할 것 같아. 주변에 한식당 하는 아줌마들을 보면 다녕 씨가 좋아하는 걸 다 하더라. 근데 다녕 씨가 직접 한식당을 차리면 주방에서 나물을 무쳐야 하고 내가 한식당을 차려주면 한복을 입고 카운터만 보면 되는데, 어쩔래요?"


살짝 흔들렸다. 그 말이 사실일지 몰랐다. 하지만 나는 나를 안다. 주방에서 설거지를 할지언정 내가 주인이어야 살지, 누군가 선심 쓰듯 해주는 걸 받고 기뻐하며 살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내 꿈은 내가 꾸고 그 꿈을 이룰 사람도 나여야 한다는 걸 너무 잘 알았던 것이다.


바느질 공방을 시작한 건 수업이 오후에 있으니 오전 시간을 활용하고 싶어서였다. 처음에는 요즘 세상에 누가 맞춤옷을 주문할까 싶어  기성복을 떼어다 파는 다. 물건을 권하는 게  민망하고, 재미가 없었다. 만든 옷을 조금씩 섞어 팔다가 아예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의외로 바느질을 배우거나 옷을 맞춰 입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았다. 여름 한 달간 흰색 블라우스에, 그림을 넣은 작품을 50개는 만든 거 같다.  내 스타일대로 하면 되겠구나 하는 자신감을 준 작품이다.



흰 블라우스를 만들고 보니 꼭 요리사 같아 그림을 그렸던 첫 작품. 똑같이 만들어 달라는 사람이 많아 신나게 미싱을 밟고 그림을 그렸다.



빨간 꽃 노란 꽃, 피고 져도 미싱은 잘도 돌았다.


바느질을 배우러 온 사람들도 많았다. 공업용 미싱이 생긴 것도 무섭지만 소리를 들으면 진짜 공장 같다. 미싱에 실도 못 끼우는 사람을 직선 정도라도 박게 가르쳐 주고, 부업으로 소품을 만들어 보라고 권하면 대부분 싫다고 했다.


취미로 만들 때는 다들 신기해하며 예쁘다고 하다가, 돈을 받는 순간 고객 모드가 된다. 앞치마 하나도 끈이 짧다는 둥, 얼굴에 색이 안 받는다는 둥, 컴플레인을 듣기 마련이다. 그런 스트레스를 받는 게 싫다는 것이다.


취미로 뭔가를 할 호사스러운 삶을 누려보지 못한 나는, 나에게 바느질을 배운 사림들이 안타깝기도 하고, 부럽기까지 했다. 취미로 뭔가를 하는 건 돈을 쓰는 것이고, 그때는 부러워하며 칭찬을 해 준다.


내가 돈을 받기 시작하는 순간부터는 책임을 져야 한다. 돈에 대한 책임을 지는 걸 두려워하면 일을 할 수가 없다.  고객의 컴플레인은 결국 고객의 need를 파악하는 기회이고 나를 숙련시키는 과정인데 그 고비를  못 넘기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나에게 바느질을 배운 조선족 아주머니 한 분은 딱 하루 배우고, 다음 날 쌍수를 한다고 안 나왔다. 수술이 아물고 나서는  중국에 있는 가족에게 돈을 부쳐야 한다며 노래방 도우미로 나간다고 해서 안타까웠던 일도 있었다. 


하고 싶던 일을, 해야만 하는 일로 만들고 각종 컴플레인을 들으며 3년만 버티면 어느 정도 전문가가 된다. 어설픈 컴플레인은 내 노하우로 설득을 하거나 이길 힘이 생긴다. 이쁘다, 솜씨 좋다, 성격 좋다 등등의 칭찬보다 내가 만든 작품을 돈 내고 사면 그게 최고의 칭찬이고, 내 자신감이 된다.


내가 번 돈으로 세금내고 반찬도 산다는 것은 보람 있고 귀한 일이다. 어버이날, 내 부모님이나 시부모님께 똑같은 용돈을 드리고, 돈이 많이 드는 치과치료를 받아도 남편 눈치를 보지 않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다.


이혼 전, 어버이 날 용 문제로 전남편과 싸운 적이 있었다. 주변 친구들에게 물어보면 , 남편 몰래 친정 부모님 용돈을 드린다 했다. 그걸 굳이 남편한테 얘기하냐며 나를 나무랐다. 나는 거짓말도 하기 싫었고, 남편 몰래 친정부모님 용돈을 드리고 싶지도 않았다.


융통성이 없었는지 '애교'가 없었는지는 몰라도, 일일이 타당성을 이해시키고 평등을 요구하며 피곤한 싸움을 많이도 했던 것 같다. 그런 불평등을 경험한 나는 경제적 자립이 이혼이 아니라도 최우선 과제였었다.


한국의 아들들은 엄마 같은 아내를 원하고, 딸들은 엄마처럼은 살지 않겠다는 얘기를 흔히 한다. 그런 생각을 가진 둘이 만나서 결혼을 하면 두 사람이 기대하는 이상적인 삶의 세대차이는 50년 이상이 날 것이다.


엄마들이 딸을 교육시킬 때, 남편 그늘에서 벌어다 주는 돈을 받아 아이들을 잘 키우는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이라 가르치면서 한 편으론 전문직 직업을 가진 당당한 여성으로 살기를 바란다. 두 삶의 차이에서 딸들은,  내가 원하는 게 혹은 잘할 수 있는 게 뭔지를 모른 채 결혼과 육아를 맞이하게 된다.


자신이 원하는 삶과 부모가 규정해 놓은 삶 사이에서  그런대로의 평안한 행복을 누린다. 하지만, 행복한 것 같은데 자꾸 속이 허한 상태를 견뎌야 하는 '김지영' 들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환경미화원을 하는 아버지의 밥벌이는 고귀하게 칭송하면서, 아이들을 어린이 집에 보내고 출근하는 직장 여성에게는 왜 그리 불쌍한 취급을 할까? 목표한 성취를 위해 공부와 인맥에 투자를 하는 남자는 비전이 있다고 한다. 여자가 목표를 위해  노력을 하면 자꾸 애는 어쩌냐고 묻는다. 이기적이거나 욕심이 많다고 비난을 한다. 혹은 남편의 수입이 없는 절박한 생계형이라고 긁어 내리고 싶어 한다.


여자나 남자나 일을 하는 건 취미가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서이다. 돈을 벌어 저축을 하고, 보험을 넣고, 공과금을 내는 것이 생계를 꾸려가는 것이고, 모든 직업은 생계형이다.


세상에 태어나 똑같이 인정도 받고 교육도 받았다. 내 한 몸 생계를 책임지고, 가족을 부양할 수도 있다는 건 남녀 불문하고 자랑스러워해야 할 일이다. 여자라 해서, 생계형이라 해서 불쌍하거나 억센 취급을 받을 이유가 없다.


팔자가 세다는 건 내 힘으로 인생을 설계하고 개척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남편이라는 창으로만 세상을 보고, 남편의 바운더리 안에서만 사는 것이 좋은 팔자라면 나는 팔자가 어지간히 억세다. 나에게 팔자가 세다고 하면 주체적 삶을 사는 칭찬으로 들으련다.


박경리 작가가 <토지>를  쓰기 위해  미싱을 가지고 강원도로 갔다고 한다. 혹시 글이 안되면  미싱으로 생계를 꾸려 갈 비상 대책이었던 것이다.  나에게 미싱이 있고 그림이 있으니 이제 <토지>만 쓰면 된다.^^


생계형 노동자는 오늘도 너의 길을 가거라마

https://brunch.co.kr/@red7h2k/4

https://brunch.co.kr/@red7h2k/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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