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녕 Feb 03. 2020

행복에도 나름의 비용이 들어

행복하기란 어찌나 피곤한 지

젊은 날의 무라카미 하루키는 마라톤을 하는 이유가 맥주라고 했다. 한 시간 이상을 뛰면서 그 고통을 참을 수 있는 힘이 마라톤 후에 마실 맥주라는 것이다. 예전의 나는, 그 구절을 읽고 공감이 되지 않았다. 맥주가 뭐라고 한 시간 이상을 달릴 수 있을까 싶었다.


나이가 들어보니 그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어제와 오늘이 헷갈릴 정도로 반복되는 일상에는 인위적인 행복을 누릴 장치가 필요하다. 즐겁지 않은 상태를 길게 할수록 즐거움의 강도가 클 수밖에 없다. 마라톤은 내가 일부러 고통을 자처한 것이고 언제쯤 끝나는지 예측이 가능하다. 따라서 마라톤의 한 시간 고통쯤은 안정적이고 계획적이며 보상이 확실하다.


목적이 단순히 맥주였다 해도, 뛰면서 흘리는 땀은 몸속의 노폐물과 세상 시름을 함께 공중분해시켜 주었을 것이다. 등산이나 달리기의 역할은, 몸에게 통증을 주어 머리를 쉬게 해 주는 것 같다. 딸이 언젠가 남자 친구와 헤어져서 집으로 온 적이 있다. 안 가려는 딸을 억지로 끌고 동네 뒷산으로 갔다. 등산을 하는 한 시간 동안은 헤어진 남자 친구 얘기를 하지 않았다. 숨을 헐떡이며 땀을 흘리는 동안 실연의 아픔에서 해방이 되었다고 딸이 좋아했다.


내가 의도한 고통인 달리기나 등산과는 다르게, 우리가 삶에서 만나는 '마라톤'은 끝을 알 수가 없어 두렵다. 예고도 없이 훅 쳐들어온 '마라톤'이 언제쯤 끝나는 지를 안다면 견디기가 훨씬 수월 할 것 같다.


우리가 인생에서 만나는 '마라톤'은 두 가지 종류가 있을 것이다. 하나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타고난 것이거나 환경적인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잘못된 선택으로 만들어진, 노력으로 벗어 날 수 있는 것이다. 성인이 되어 내 몸 하나 건사하며 사는 것부터 '등산'만큼이나 숨찬 일이다. 돌봐야 하는 아이나 노부모까지 있다면 인생 자체가 벅찬 마라톤이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살아내는 일 자체가 숨 한 번 돌리기 힘든 달리기의 연속다. 그렇다면 마라톤 끝에 오는 '맥주'만 보고 달리기에는 내 인생이 너무 가혹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렇게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는 크고 작은 환란들을 뛰는 중에 처리해내며 살아가는 것 같다. 달리는 중에도 우리는 자잘한 '맥주'로 목을 축여주고 힘을 내야 한다.


달리기를 하고 있는 와중에 행복을 찾으려니 잘 보이지도 않았고 발견한 행복을 누리기도 숨이 찼던 것이다. 내가 어쩔 수 없이 떠안고 뛰어야 하는 타고난 짐들은 그냥 잊자. 비행기 위의 선반에 넣고 문을 딸깍 닫아 버리듯이, 안 보이게 해야 한다. 내가 바꿀 수도 없는 것들을 계속 들춰가며 껴안고 가려면 지레 힘이 빠질 노릇이다.


내 노력으로 끝나는 마라톤은 느려도, 뛰다 보면 결국은 끝이 난다. 힘든 일을 할 때는 시간도 어찌나 더디 흐르는지 모른다. 플랭크를 하면 일 분도 얼마나 긴 지 해 본 사람은 안다. 몸에 이로운 것은 쓴 것처럼, 힘든 일들도 몸에 좋은 역할을 할 거라고 위안을 좀 해 보면 어떨까 싶다. 어려운 철학 수업은 힘들고 시간이 느릿느릿 간다. 우리가 겪는 어려움 지루하지만 교훈이 있는 철학 수업쯤으로 여기자는 것이다.


그래도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행복을 알뜰히 찾아서 누리는 일이다. 힘든 일들이 어느 날엔가 홀연히 사라지고 행복하다는 느낌이 드는 날이 분명히 온다. 그렇게 표가 나게 행복한 날이 오기 전까지는 애써 찾아야 행복이 내게  와 준다. 달리기에 힘을 쏟느라 시원한 바람과 꽃향기를 낭비할 순 없는 것이다.


밥벌이에 지치다 보면 아기자기한 기쁨을 흘려 낭비하기 쉽다. 어지간한 일에는 무뎌져서 행복의 맛을 못 느끼는 것이다. 아이가 어렸을 때 감기에 걸려 입맛을 잃은 적이 있었다. 모유를 떼고 밥을 곧 잘 먹다가 갑자기 우유만 먹는 것이었다. 몇 주를 우유만 젖병에다 먹길래 걱정이 되어 소아과에 갔다. 소아과 의사의 말이, 일반식의 맛을 잊어버렸으니 다시 모유를 떼고 이유식을 시작하는 것 처럼하라고 했다.


숭늉이나 죽을 먹여서 밥 맛을 알게 하고 야채와 계란으로 전을 조금씩 부쳐  다시  음식 맛에  익숙해지는 과정을 거쳤다. 삶의 미각을 찾는 일도 같은 순서일 것 같다.  무뎌진 행복 감수성 회복하려면 작은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뾰족이 나온 풀꽃을 보며 반갑게 웃어주고, 작년에 입었다 다시 꺼내는 코트에도 기특해해 주는 것이다. 행복을 찾아내는 눈도 키워야 하고 연습도 필요하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즐겁기란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금방 깨닫는다. 이국적인 음식을 세 끼 연속으로 먹고 나면 잘 안 먹던 신라면 생각이 절로 난다. 교과서에서나 보던 유명한 그림도 두 시간 넘게 돌아다니다 보면 감동도 시들해져서 거기서 거기 같아진다. 흥분된 행복감을 유지하는 일은 참 피곤한 일이다.


일상에 자극을 주어 행복감을 느끼게 하는 것들이 많다. 운동이나 취미 활동, 여행이 그것이다. 그중에 제일은 연애가 아닌가 한다. 연애는 리스크가 큰 만큼 오는 보상도 크다. 못하던 운동도 하고 싶게 만들고 같은 음악도 새롭게 들리게 하는 마력을 가진 게 연애이다. 많은 예술가들이 연애를 함으로써 작품 활동이 왕성해지는 걸 많이 봐 왔다.


결혼도 했고 가족도 있으면 일상 속에서 사랑하는 감정을 끊임없이 샘솟게 해야 덜 지친다. 마음을 쓰고 돈을 쓰는 곳이 내가 사랑하는 것이다. 마음만 쓰고 싶고 돈은 안 쓰고 싶으면 그냥 좋아하는 것이고 돈을 썼는데 기쁨도 주면 그건 확실히 사랑이다.


내가 바느질 공방을 할 때, 바느질을 배우며 알바를 하던 친구가 있었다. 바느질 공방을 너무나 사랑했지만 시간 대비 수입은 영어를 가르치는 일이 훨씬 나았다.  알 하는 친구 월급을 벌러 영어 수업을 나갔다. 그때 내가 하던 말이 "니 월급 벌어 올게."였다. 바느질은 나를 돈 버는 노동도 잊게 하는 '사랑'의 대상이 되어 주었다.


지금은 자식이나 남편에게 뭔가를 해 주는 것이 즐겁다. 내가 '너 때문에 돈을 번다' 싶은 것이 많으면 사랑의 대상이 많은 것이다. 여행, 문화활동, 맛있는 음식 등등이 돈 버는 힘듦도 잊게 해 주는 자극이 될 것이다


하루키가 맥주를 위해 뛰듯이 우리는 뭔가를 향해 뛰고 있다. 하지만 인생 자체가 마라톤인 우린, 뛰면서도 행복을 찾아야 한다. 결승선에서 받을 상이 따로 있어도, 과정에서 받을 작은 '맥주'는 노력으로 찾아야 한다. 젊은이들은 무조건 많은 경험과 연애를 해 봐야 한다. 그 과정에서 쓴 맥주도 단 맥주도 맛을 보는 것이다.


나이가 든 사람은 '연애'에 준하는 기쁨 거리를 만들어, 행복 감수성이 무뎌지지 않게 휘휘 흔들어 줘야 한다. 마음과 시간, 노력이라는 비용을 치러야 행복이 놀러 와 준다.


적절한 행복감을 유지하며 산다는 건 상당히 기술을 필요로 한다. 내 호흡에 맞는 행복 거리가 없나 눈을 부릅뜨고  찾고, 누려야 한다. 어디 내가 알아 봐 주지 못하고 흘려보낸 행복이 있는지 살펴야 하는 것이다.


한 끼 놓쳤다고 다음에 두 끼 몰아서 먹을 수 없듯이 오늘 분량의 행복을 낭비해 버리면 그 행복은 다시는 못 만난다. 오늘도 어딘가에 숨어서 알아봐 주길 기다리는 행복을 발견해 주자.

https://brunch.co.kr/@red7h2k/43

https://brunch.co.kr/@red7h2k/67


작가의 이전글 재혼 결혼식은 어떻게 하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